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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Feb 03. 2021

토사물을 먹어야 했던 아이

돈까스

말쑥하게 생긴 남자 아이. 잘생겼는데 귀엽다. 귀여운데 잘생겼다.


성격도 참 좋다. 편 갈라 놀지 않고 잘 어울린다. 아이들도 이 남자 아이를 잘 따른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끼도 부릴 줄 아는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가 본인 옆을 지나갈라치면, 길을 딱 막아서고는 "색시야, 어디가?"라며 능글스럽게 묻는다. 커서 여자 여럿 울릴 놈이다.


씩씩하다.



그런데 이 아이가 유독 움추러드는 때가 있다. 점심시간이다.


집에서는 순하디 순한 아이였다. 속 썩이는 법이 없었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편식을 하지도 않았고, 밥 먹기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밥을 잘 먹어서 좋겠다는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평소에는 밥 먹기를 좋아하는 아이인데, 이상하게도 유치원에서는 점심시간만 되면 기죽어 했다.


유치원에서.

아이는 점심마다 토했다.



먹으면 토했고, 먹으면 토했다.


장소 때문일까. 집 밖에서 먹기를 힘들어하는 걸까.

아니다. 잘만 먹는다. 시장 떡볶이집, 동네 햄버거집, 좋아하는 음식점도 많다.


그렇다면 메뉴 때문일까. 알러지가 있나.

아니다. 어떤 음식에도 아이는 구토를 했다. 좋아하는 반찬이 나와도 그랬다.


그 날의 식사가 식판에 담기면, 아이는 두려워한다. 또 음식을 게워낼까봐 무서워하는 것이다. 긴장한다. 그래서 배식을 받을 때면, 아이는 맨 뒤에 선다. 가장 마지막으로 받는다. 그렇게 씩씩하던 아이가, 점심시간만 되면 작아진다.


많이 먹을 필요도 없다. 몇 숟갈이면 된다.

몇 숟갈.

아이는 다시 토한다.



유치원 선생님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다.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에 대한 걱정도 크지만, 혹여나 자신의 유치원이 좋지 않은 오해라도 살까봐 무섭다. 아이를 얼마나 괴롭혀댔으면, 밖에서는 그렇게 먹성 좋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뭘 먹기만 하면 토하게 됐느냐고 말이다.


유치원에서도 애를 많이 썼다. 원장 선생님이고 원감 선생님이고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도 했다.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특별식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아이들과 다른 장소에서 먹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건 허사였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같은 문제가 반복되자, 결국 모든 부담은 담당 선생님이 떠앉게 되었다. 담당 선생님은, 어린 아이가 자신이 먹은 것을 게워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매일 보아야하는 스트레스와, 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원장, 원감 선생님의 압박에 동시에 시달리게 되었다. 고역이었다.


불안하게도, 

스트레스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날. 어김없이 찾아온 점심시간. 선생님은 모든 아이를 제쳐놓고 그 아이 앞에 가 쪼그려 앉는다. 제발 오늘은 토하지 말고 잘 먹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선생님은 최대한 상냥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직접 밥을 먹여준다.


한 숟갈.

두 숟갈.

웩.


다시 또, 아이는 자신이 먹은 걸 그대로 토해냈다. 입에서 나온 토사물은 밥을 떠먹여주던 선생님의 손에 묻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아이의 몸 속에 있던 것들이, 바닥에 두 세 덩이 뿌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화가 났다. 짜증이 났다. 자신이 대체 무얼 잘못했나 싶었다. 무슨 죄를 졌길래, 매일 남의 집 자식이 토한 걸 치워야 하나 싶었다. 아이를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되려 다른 아이보다 더 신경을 썼는데.


결국 선생님은 소리쳤다.


"내가 왜 니가 토한 걸 치워줘야 돼! 어? 내가 언제까지 치워줘야 되냐고!"


그리고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러버렸다. 바닥에 덩이져 떨어져있던 토사물을 손으로 집어 아이의 입에 우겨넣은 것이다.


"먹어! 내가 못 치워주겠으니까 먹어! 니가 토한 거니까 니가 먹으라고!"


영특한 아이는 평소에도 본인 때문에 선생님이 힘들어하신다는 걸 알았고, 선생님께 죄송해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자신에게 소리치는 것을 들으면서도 죄송해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더욱 잘 들어야 한다.


아이는 자신의 토사물에 손을 뻗었다.

움켜쥐고는, 입으로 가져왔다.

먹었다.



사건이 일어난 유치원 학급반 문에는 네모난 유리창이 달려있었다. 그래서 문은 닫혀있었지만 안에서는 밖을,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마침 그 시간, 바깥 사람이 유치원을 찾아와 있었다. 학부모였다. 본래 교무실에만 있을 요량이었을 거다. 담당 선생님만 뵙고자 했었을 거다. 그러나 선생님의 카랑거리는 목소리가 학급반을 넘어간 탓에, 그 사람의 발길은 교무실을 지나 학급반으로 향했다.


빼꼼. 바깥 사람은 반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는 봐버렸다. 토사물을 손으로 만지는 아이를. 아이는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들어 네모난 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아이와 눈을 마주친 사람.

그는 아이의 엄마였다.


소란하지 않게. 어미는 말 없이 문을 열고, 아이를 조용히 데리고 나갔다. 유치원에서 5분 거리. 집으로 가서는 아이를 씻겼다. 그리고 아이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돈까스 먹으러 갈까?"


불과 조금 전까지 바닥에 흩뿌려진 자신의 토사물을 주워 먹어야 했던 아이는, 어미의 질문에 그 모든 상황을 잊었다. 그래서 해맑게 대답했다.


"네!"



아이는 그 일이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 한다. 애초에 알지도 못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거다. 어른들의 이야기였을 테니까.


유치원에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신 것 같기도 하다. 그치만 분명 없다고 했을 거다. 진짜로 문제는 없었으니까. 자꾸 토하긴 하는데, 왜 토하는지 모르겠다고 했겠지.


어쨌든 아이의 기억에 남은 것은 돈까스다. 아이의 어미가 남편에게도 연락을 한 것인지, 그 날 아이는 엄마와 아빠와 셋이 돈까스를 먹었다. 아빠도 직장을 뒷전에 두고 곧장 달려오셨을 게다. 아빠를 일찍 본 아이는 기분이 좋았을 테고.


마치 아쿠아리움처럼.

돈까스집은 검푸르짙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다. 유치원에서 매일 토하던 아이는, 누구보다 빨리 급식을 먹으러 뛰어가던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그 날의 엄마보다도 많은 나이가 되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지언정, 그 날의 사건은 자칫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아이는 그 날을 전혀 끔찍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하나도 거북해하지 않는다. 오직 돈까스 먹을 때의 그 따뜻함과 든든함만이 마음에 남았다. 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서든 언제든 엄마와 아빠가 기적처럼 나타난다. 그리고는 돈까스로 배를 불려준다. 이 얼마나 든든한 방패인가. 얼마나 따뜻한 바람막이인가.


어른이 된 아이는 부모님과 떨어져 산다. 벌써 4년 째다. 그러나 그는 본인이 거주하는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공간은 잠시 잠자고 머무르는 자취방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에게 집은 오직 하나다. 부모님이 계신 그 곳이다. 그 곳에는 아직도 그의 방이 있고, 베개와 이불이 제자리에 있고, 할머니가 있고,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다. 그 아늑함은 오직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 혼자 먹는 돈까스에서는 그 든든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거다. 왔다 갔다 힘들어 하면서도, 길에다 시간을 버리는 걸 그렇게 아까워 하면서도, 아직도 주말마다 부모님이 계신 '집'을 찾는 게. 돈까스의 아늑함을 찾아가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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