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돼지터리언국 총리 Dec 11. 2018

'길고 긴 인생' 기다리면 삶은 언제나 전화위복

#단상 #에세이 #전화위복

<기다린다면 삶은 언제나 전화위복인 것에 대한 단상>

    '전화위복'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 하나다.

    전화위복이란 말은 내가 낙담했을 때 또는 매우 기쁜 일이 있을 때 나를 다잡아주는 말이다.

    전화위복은 지금은 속이 좀 상하고 서운하지만 언젠가 이 일이 더 잘 된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하고, 너무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이 또한 언젠간 화가 될지 모르니 경거망동하지 말자는 안정제 작용을 한다.

    얼마 전 우리 중화권 막내가 큰 실수를 저지른 일이 있었다. 결국, 그 후폭풍으로 나와 찰떡궁합이던 우리 부장이 자리를 옮기게 됐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응당 책임 라인에서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책임을 졌다는 것에서 나는 이미 우리 부장에게 무한 존경을 보낸다. 내가 대부분 마주쳤던 소위 '어른들'은 일이 터지면 막내인 나에게 책임을 미루기 바빴고, 자신은 쏙 빠져나갔다.

    그때마다 하는 소리는 

    "그맘때는 그렇게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 "네가 책임지면 시말서면 끝나는 데 나는 승진 미끄러진다", "최종적으로 기사를 쓴 것은 네가 맞지?", "자기 바이라인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법이다", "강력하게 반대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예스맨만이 정답은 아니야 현장에서 판단이 중요하지"

    모두 개소리다.

    일이 벌어졌을 때 현장의 소리를 아무리 전달해도 '못 먹어도 고'를 외치는 그들은 임전(臨戰) 때는 '진격 앞으로'를 외치며 후방을 지킬 뿐이고, 논공행상의 자리에서는 맨 앞에 서서 자신의 공을 치켜세운다.

    일이 틀어졌을 때는 역시 뒷전으로 물러나 핑계를 대기 바쁘고, 책임을 미루는데 혈안이 된다. 동지 의식은 없고 유체이탈 화법이 난무한다.

    홀로 남겨진 사슴 새끼같이 어린 것은 눈만 꿈먹꿈먹하고 목이 처질 일만 기다리는 것이다.

    너무 격이 없이 특파원들을 대하고, 현장의 의견을 잘 들어줬던 부장의 퇴각은 중화권 특파원들에게는 약간 충격이었다.

    사실 그런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특히 대북 관련 소식은 정확도를 추구하기에는 리스크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이번 오보 사태에는 말할 수 없는 사정까지 곁들여져 있어 이번 인사는 누가 봐도 본 보기식 인사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 근무를 마치고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냥 묵음이 이어지다가 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부덕해서 그렇지 뭐. 전화해줘서 고맙네"

    "아네요. 우리가 좀 더 챙겼어야 했는데. ㅇㅇ이도 이제 왔는데 걱정입니다"

    "기죽지 않게 잘 챙겨주소"

    "부장 어차피 휴가도 많이 남으셨는데 베이징에나 한번 오세요"

    "말이라도 고맙소. 또 봅시다"

    "네. 자주 연락드릴게요"

    짧은 대화였지만, 서로 마음은 다 주고받았다.

    부장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전화위복이었다.

    "부장 전화위복일 겁니다" 이 말을 꼭 해야 했는데 못 했다.

    근데 정말 전화위복일 것이다.

    내가 주로 일했던 경찰청에서는 승진이 한 해의 최대 관심사이다. 승진 후보자들은 무슨 마라톤 하는 것처럼 승진을 결승점으로 여기며 한 해 동안 장거리 경주를 한다.

    결승점을 먼저 통과하면 엄청난 축하를 받고, 낙오된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까?

    물론 승진자들은 원하던 바를 이루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아니 많은 경우 나는 승진자들이 자기 부하의 잘못으로 인해 옷을 벗거나 변변찮은 자리를 전전하며 허울뿐인 계급장만 붙들고 사는 '위대한 승리자'가 된 것을 자주 봐 왔다.

    반대로 낙오한 사람은 절치부심해 더 좋은 자리로 가거나 그냥 그 자체로 득도라도 한 사람처럼 지금껏 챙기지 못했던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오랫동안 서먹서먹했던 부녀 사이에 화해를 한다거나 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뭐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자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다 거기서 거기고, 오히려 빨리 앞질러 간 사람이 더 불행해지는 모습도 많이 본 거 같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나는 대학교를 매우 늦게 들어갔지만, 대신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나 유학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학업을 쭉 마쳤다.

    정부 장학생이 돼서 유학을 갔던 학기를 인정받았고, 인턴기자 때도 한 학기 학점을 두둑이 챙겨 받았다. 또 코트라 인턴 때는 인턴을 하면서 작성한 보고서를 학과장님께 제출해서 또 그에 상응한 학점을 받았다.

    이 모든 게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린 나이에 입학을 했다면 해보기도 전에 '에이 무슨 인턴 생활을 학점으로 주겠어?', '내가 무슨 정부 장학생이 되겠어?' 나도 이런 생각을 먼저 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고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자마자 대학에 다녀서 미처 저런 방법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산전수전 육탄전을 다 겪고 학교에 들어온 나같이 노회한 학생은 '한국 사회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이치를 잘 안다.

    뭔가 될 것 같은 것은 가서 물어보고, 따져보고, 부딪쳐 보면 답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2학기를 낭비하지 않고 교외활동을 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결국 내 또래인 01학번과 비교해 조금 늦게 졸업을 한 편에 속했다. 그 친구들과 비슷한 시기에 졸업과 취업을 한 셈이다.

    사실 마지막 학기 초에 취업했으니 졸업만 좀 늦었지 그 친구들보다 비슷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처럼 지금 보면 세상 불행하고, 망한 것 같은 일도 나중에 기다려보면 전화위복인 경우가 많다.

    베이징 특파원에 나올 때도 그랬다. 사실 베이징에 오기에 앞서 한 텀 이르게 선양 특파원 오퍼를 받았다. 선양에 응시자가 없어 들어온 제안이다. 그때 약간 고민이 됐지만, 전북에 있던 선배들과 가족들을 고려해 그냥 한 템포 쉬기로 했다.

    기자라면 누구나 바라는 특파원이기 때문에 많이 아쉬웠지만, 그때도 전화위복을 생각했다.

    그 뒤로 언제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HSK 6급도 다시 시험을 치고, 중국어 회화책도 조금씩 봐가면서 코트라 인턴 때 봤던 중국 현지매체들도 다시 들여다봤다.

    그 뒤로 1년 반쯤 지났을 때인가 당시 내가 선양특파원 후보에 올랐던 것을 기억했던 에디터가 나에게 베이징 특파원에 지원해 보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는 갱신된 HSK 자격증과 다시 기름칠한 중국어 실력으로 추천자가 부끄럽지 않게 지원서를 냈고, 면접 없이 당당히 발령장을 받았다.

    물론 베이징에 와서 이게 다시 전화위복이 됐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말이다.

    어린 연차에 '와. 운 좋다' 생각하고 온 베이징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됐다.

    북한이 하루가 멀다고 미사일과 핵실험을 해댔고,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독살을 당했고, 사드 사태가 터졌고, 트럼프가 방중했고, 김정은은 3연방 중국에 왔고…뭐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물론 그때도 나는 전화위복을 생각했다. 아. 이리 바쁜 일상이 언젠가는 나에게 복이 될 거다.

    나는 그것을 믿었고, 지금 열심히 글을 쓰는 데 그 경험들을 녹여 넣고 있다. 

    우리 부장에게 직접은 못했지만, 이 말을 이 공간을 빌어서 해드리고 싶다.

    '부장 어쩌면 지금 못 쉬었으면, 과로로 건강을 해치거나 더 큰 사건이 터져 회사를 그만뒀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부장 지금 쉬시면서 하시고 싶은 공부 더 하시든 가족들과 시간을 더 보내시든 하면 더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라고 말이다.

    세상은 그냥 오래 기다리면 언젠가 전화위복이란 말이 떠오르는 시간이 반드시 온다.

    전화위복. 불행할 때나 행복할 때 꼭 이 말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단상 #전화위복 #인생은길다

++돼지터리언 베이징 방랑기 구독해주세요.

https://brunch.co.kr/@kjbsem

베이징 맛집 유랑기 <맛객>

에세이 시리즈 <단상>

생생한 베이징 특파원 취재현장 <취재현장>

동물이야기 <초보 댕댕이시터의 보모일기>

지금 들러보세욧.

이전 10화 해진 옷을 꿰매입는 것에 대한 단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