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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Dec 19. 2018

조급증을 앓는 나...좀 그럼 어때

#단상 #에세이 #조급증

<조급증을 앓는 나에 대한 단상>

    '지금 바로 할 수 있을까요?'
    웬만해서는 출입처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편이지만, 유달리 저 멘트를 많이 날린다. 몇몇은 나의 조급증에 혀를 내두르기도 하는데 지금은 많이 고쳤다.
    그냥 담당자한테 물어서 민폐를 끼치기보다는 주니어티를 좀 벗어나면서부터는 여기저기 전문가를 찾아서 대충 때운다고 할까. 아무튼, 혼자 바쁜 것은 그대로인데 사람 귀찮게는 안 하려고 노력 중이다.
    와이프도 나의 조급증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항상 어딜 가든 저기 30m 앞에서 개 끌듯 록수를 끌고 다니고, 사회문화 교과서에 나오던 북한 사회 삽화처럼 저만치 앞서 걷는 것은 당연지사다.
    밥을 안 먹는 애들한테도 스팸이라도 구워서 빨리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말 다한 거다.
    특히 남한테 피해 주지 않는 영역에서는 더 그런 편인데 이런 성격을 잘 보여주는 황당한 일화가 있어 하나 소개해 본다.
    대학 시절 간혹 교수님들은 기말리포트를 학기 초 또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바로 내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보통 학생들은 데드라인이 거의 다 왔을 때쯤 리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하고, 마감 날이 다 되서야 벼락치기를 해서 완성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반대다.
    그날로 도서관으로 가서 바로 리포트를 쓰기 시작한다. 15장이든 20장이든 대충 전공 서적 찾아서 읽고, 논문 몇 개 후다닥 검색해서 리포트를 다 쓰고 나와야지 안 그러면 직성이 안 풀린다.
    물론 이따구로 리포트를 내는데 성적이 좋을 리가 있겠나. 그래도 저렇게 해야 속이 다 시원하다.
    회사 생활도 마찬가지다. 기사를 빨리 빨리 쓰는 편인데 가끔 특집 기사 지시가 내려졌을 때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냐면 내가 아무리 용을 써 봤자 특정한 날이 되지 않는 한 작성할 수 없는 기사를 맡았을 때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중국의 짝퉁 블랙프라이데이인 알리바바의 광군제 행사 같은 특집이 그러한데 이건 내가 아무리 빨리 쓰고 싶어도 그날 매출액이 안 나오면 쓸 재간이 없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면 전년도보다 실적이 훌쩍 뛰어넘는 것을 가정하고 하나의 버전을 써 놓고, 전년도나 비슷하거나 그보다 떨어진 경우를 상정해 기사를 또 하나 써 놓는다. 그리고 숫자 칸만 비워둔 다음에 결과가 나오면 후다닥 기사를 마무리해 보내 버린다. 물론 기사 퀄리티는 말해봐야 무엇하나. 걍 대충 알아먹으면 된거다.
    베이징에 와서 내가 제일 고통스러워하는 기사 중 하나가 바로 매년 3월 15일 써야하는 중국 소비자의 날 기사다.
    이날은 한국 특파원들 대부분이 대기 상태에 들어가는 데 왜냐하면 사드 사태 이후 한국 기업을 겨냥한 중국 관영 방송인 CCTV의 고발 보도가 나올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날 당일 밤에 방영되는 이 고발 프로그램은 당의 선전도구인 중국 언론이 유일하게 심층 취재를 하는 시사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잠입 취재도 하고, 변장하는 기자도 있고, 취재하다가 취재진이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옛날 우리 카메라 출동 코너에다가 소비자 고발을 합쳐 놓은 프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나는 이 프로그램 때문에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이다. 여태껏 모셔온 1, 2진 선배들 모두 중국어과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나마 중국어 상태가 나은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기사를 작성했다. 문제는 이 기사는 꼼짝없이 2시간 동안 프로그램을 다 봐야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의 내용이 어렵기도 하지만, 기사를 미리 작성해 놓을 수도 없는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진짜 나 같은 조급증 환자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두 시간을 멍하니 TV를 보고 있으면, 언어적 답답함보다는 그냥 기사를 빨리 마무리 못 하는 상황에 지쳐서 진이 다 빠져버린다. 그래서 맥도날드 배달 서비스를 세 번 부른 적도 있다.(뭔 상관)
    최근 또 그 조급증이 발현되는 영역이 생겼다.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처음 글을 쓸 때 정한 목표는 내년 봄까지 어찌됐든 초고를 마무리하고, 여름에는 원고를 싸매고 노빠구로 출판사로 쳐들어가든 어쩌든 책을 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오는 원고들이 다들 시원찮다.
    그래서 쓰고, 쓰고, 또 쓰고, 쓰면서 기획을 하고, 쓰다가 망한 글은 버리고, 좀 괜찮으면 페북에 올려보고를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적어도 300페이지 분량을 채우려다 보니 원고 진행률과 내 조급증 간의 괴리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 계획대로라면 이미 3분의 2지점을 넘었어야 하는데 이건 원고 진행률이 깜찍이 소다에 나온 달팽이급이다.
    에세이는 특히 하루에 하나씩은 올리고 있는 편인데 글이 영 시원찮다. 기말리포트를 당일날 해치워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나 같은 조급증 환자에게는 내장 위치가 수시로 바뀌는 경험을 매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가 그만 주화입마에 빠져서 최근 내상을 입은 듯하다.
    머리가 핑~ 괜춘, 핑~ 괜춘, 핑~ 괜춘을 반복하는데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어제 낮잠을 좀 잔 뒤에는 나아지더니 출근해서 기사를 쓰고 나니 또 그렇다.
    그렇다고 의식이 없어지거나 머리의 총기가 사라지지는 않는데 시야도 그렇고, 아무래도 지병인 고혈압이 문제인 것 같다. 그리고 한 자세로 고정한 채 글을 쓰는 습관이 이런 증상의 원인인 것 같다.
    테니스를 하고 사우나를 했더니 좀 몸이 홀가분해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제 좀 쉬어야 한다는 머릿속 이성과 조급증이 지배하는 충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나도 마흔에 다가가면서 예전처럼 몸을 함부로 굴릴 시기는 지난 모양이다. 아. 이제 뭐 정력까지 쇠하고 망할 일만 남은 것인가.
    사실 조급증이 어디서 왔는가 어젯밤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을 해봤다.
    처음 시작은 대학 가기 전에 알바기계처럼 살던 때인 것 같다. 하루를 26시간처럼 살던 때여선지 당시에는 그때그때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일단 일정을 기억 못 해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학원이라는 것이 그냥 애들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 상담, 중간·기말고사 스케줄 체크, 예상 시험문제 출제, 수업 준비, PC방 간 놈 잡으러 다니기, 원장과 입씨름, 월급 액수 체크까지 오만 잡가지 것을 챙겨야 한다.
    또 과외 역시 동선을 잘못 짜면 지각하기 일쑤라서 수업 시간 짜는 게 중요하다. 과외 학생 집이 한 아파트에 몰려 있을 때는 굉장히 헛갈리는데 가끔 과외 날이 아닌 학생네 집에 가서 수업을 한 적도 있다. 걔도 정신이 없었는지 수업을 받고 앉아 있다가 다른 학생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알고 둘이 한참을 웃다가 나온 적도 있다.
    아무튼 그때는 순간순간 일을 매듭짓지 않으면 나중에 감당이 안 되는 쓰나미가 몰려오다 보니 일이 잘되든 안 되든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다음 일을 손에 잡았던 것 같다.
    그게 인이 박히면서 지금의 조급증 환자가 탄생한 것 같다. 내가 날 제일 잘 안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이게 맞는 것 같다.
    책은 그리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만, 이 또한 내 스타일 아니겠나. 다만, 그렇게 대충대충 마무리하기에는 이번 일은 너무 크다는 게 문제다. 근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책이 퀄리티가 좀 떨어지면 어떤가 내가 그 모양인데 하하하하.
    피검사랑 소변 검사하러 병원에 왔는데 점심시간에 걸려 쫄쫄 굶으면서 '괜히 이런 짓을 벌여서 이게 뭐람' 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 줄 적어 본다. 젠장.
#단상 #조급증 #얼른쓰고털자 #조급증환자책보실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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