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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Nov 17. 2018

둘째로 산다는 그 설움의 세월에 대한 단상

#단상



    토요일 새벽이라 단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온수매트에서 뒹굴뒹굴 따봉을 날리고 있었다.
     발제 거리를 둘러보다가 불연듯 전두엽을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거마냥 눈앞이 깜깜해졌다.
    따봉질을 멈추고 주말 근무 발제 거리를 찾을까 해서 메모장을 펴는 순간이었다.(특파원은 주6일제. 이니님 높이곰 도다샤 우리도 52시간제 좀 하게 해주세요)
    메모장에 발제 양식인 오늘의 날짜 '10월 20일'을 타자로 치다 보니 익숙한 숫자가 아닌가.
    뭐지...
    생각해보니 둘째 비글 단이의 생일날. 헙. 아무도 몰랐다. 상록수님도 나도, 양가 할배 할매, 비글 1호, 아니 온 우주가 몰랐다.
    그를 낳은자, 탯줄을 끊은 자, 끔찍히 예뻐하는 자도 모두 그의 강림 날을 잊은 것이다.
    그렇다. 첫째의 책임감과 짐이 무겁지만, 노존재감 둘째의 설움이란 이런 것이다.
    사실 우리 집의 모든 금융 지원과 물자 보급 시스템은 첫째에 맞춰져 있다. 항시 헌옷, 부서진 장난감, 쓰다만 스케치북, 다 쓴 물감은 둘째 손에 쥐어진다. 무슨 헌옷 수거함도 아닌데 말이다.
    둘째들이 애교가 많은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라 했던가.
    생각해보니 1녀1남 중 둘째인 나 역시 말썽 한 번 피운 적이 없이 컷다.(#노근거노알길)
    둘째의 심리적 상태란 항시 앞서 태어난 별로 시답잖은 존재가 나이 빨로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집도 그랬다. 없는 형편에 모든 사교육의 혜택은 손가락이 없음 셈을 못하던 눈누난나 누나에게 다 갔다.(우리 남매는 사이가 조아요. 이보시오 누나양반 영 좋지 못한 곳에 발길질을 했구려)
    실제로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고 내가 고딩이 되고 나서야 그것도 사정사정해서 수학 보습학원 1과목을 등록해준 게 내가 기억하는 사교육의 전부다. (역시 공부는 교과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공부에 소질 있는 것은 나였다. 당시는 뭐 의식하지 않고 지나쳤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이 이 지점이다.
    생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평생 제대로 챙겨 본 적이 있던가. 연애할 때나 좀 챙기나 했더니 상록수님과 나는 정확히 1년차로 생일이 같다. 그 뒤로 내 생일은 달력에서 지워졌다.
    첫째 몰빵 현상은 아이 둘을 낳고(내가 낳은 건 아닙니다만) 보니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우리 상록수님도 첫째에게 모든 정성과 공을 들인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사실 둘째가 15.3배 정도는 더 귀엽고, 어깨너머로 배워도 연년생 형보다 배우는 것도 빠르지만, 상록수님은 언제나 첫째 몰빵이다.(비트코인 같은 기지배)
    어느 날 이유를 물었다.
    "호수는 예체능 같은 거 시키고, 단이를 공부를 좀 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는 뎁쇼"
    "가만히 있어. 그냥"
    "눼눼눼, 쇤네는 이만 물러갑습죠"(눈치눈치)
    나중에 진지하게 물어보니 첫째가 잘못되면 집안이 평안하지 않을 거 같단다.
    자기도 이성적으론 첫째보다 둘째가 더 영민한지 알지만, 부모가 무슨 학교도 아니고 내 자식 모두 멀쩡하게 키우고 싶단다.
    일견 맞는 말 같아 두 번 묻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상록수님도 2녀1남 중 장녀. 공부에 소질은 없었지만, 어쨌든 석사까지 마쳤다.
    첫째는 첫째대로 둘째는 둘째대로 애환이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미역국도 안 끓였는데 이를 어쩐다. 상록수님을 깨우러 안방으로 슬금슬금 가야겠다.
    오늘 퇴근길에는 단이가 좋아하는 빠바 슈퍼윙스 케이크랑 문어넛 옥토포드 신형(연구실) 장난감이라도 사가야겠다.
    단아, 우리 핵겸댕이 생각해보니 넌 반평생을 중궈에서 살고 있구나. 스모그로 빚어진 내 새끼. 니가 애비 때매 고생이 많다. 단이 생일 축하해.
#단상 #둘째라서서러워요 #생일없는소년들 #단아유산은너줄게 #맛난거사먹느라싹쓰고죽을거지만 #니들이설움을알어 #첫째이못된기지바지

++요러분 오늘 동생들한테 전화 한 통씩 넣으세요. 둘째들아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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