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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Feb 11. 2019

첫사랑은 기억 속에 있을 때 아름답다

#에세이 #첫사랑

<첫사랑을 그리워 하는 것에 대한 단상>


    '나는 첫사랑하고 살고 있다'

    이게 행복할 거 같지? never.

    나는 의외로 심수봉, 백지영, 린 같이 서정적인 노래를 하는 가수를 좋아하고, 최백호 아재처럼 도라지 위스키 같은 노래를 하시는 분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노래를 들을 때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무리 예전에 읽었던 '너의 이자를 먹고 싶어' 같은 로맨스 소설이나 '오겡끼 데스까' 같은 로멘틱한 영화를 떠올려 봐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록수, 그러니까 우리 아내를 만난 것은 재수학원에 다니던 때니까 내가 20살, 록수가 19살일 때다.

    어려서부터 만나다 보니 어언 18년 차에 접어들었고, 우리는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아, 연애하고 싶다', '떨리면서 이성의 손을 잡아 보고 싶어' 라는 말을 할 정도로 가족스럽다.

    사실 록수 이전에 교회에서 펜싱을 하던 한 동생과 요샛말로 썸 비슷구레 한 것을 탄 적이 있는 데 진짜 무슨 드라마처럼 연애하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이름마저 페어리 같았던 그녀는 펜싱부에서 합숙을 하며 지냈다.

    우리는 합숙과 기숙사 생활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토요일에 주로 썸을 탔다.

    교회 청년부 모임에 함께 가기도 하고, 서로 틈날 때 삐삐 메시지도 남겨 가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시내에서 교회가 있는 시골 동네까지 59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동네 골프장인 팔봉CC 입구에서 내려서 걷던 시간이다.

    다정한 교회 오빠였던 나는 미리 시내에서 김밥을 두 줄 사서 그녀와 함께 먹으며 한 시간 정도 걸어 교회까지 가곤 했다.

    손을 잡았던가 안 잡았던가 기억은 안 나는데 록수와 손잡았던 전주 영화 골목이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안 잡은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아름답기만 한 풋사랑은 순식간에 종말을 맞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최고 무식쟁이에다가 날건달로 당시에 사채업을 하던 반달(반건달)이었다.

    어느 날 삐삐에 날아든 그녀 아버지의 메시지를 듣고 나는 그만 공중전화에서 지릴 뻔했다.

    삐삐 녹음 내용은

    '너 이 개XX, 우리 딸한테 한 번만 더 껄떡거리면 XXXX, 알았어? 이 스보롤 XXX, 차 뒷바퀴에 머리통을 XXX, 개XXX, 아주 창자를 XXX, 눈알 흑자(검은자 아님 흑자)를 쪽 뽑아 XXX, 알았냐? 이 대가리 피도 안 마른 XXXX야'였다.

    그 뒤로 그녀는 아버지에게 가위로 머리가 깎였는지 한동안 교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시내버스정류장에서 단발머리를 한 채로 발견됐다.

    이게 첫사랑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고, 아무튼 저런 노래를 들을 때 그녀가 생각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첫사랑은 아닌 것 같다.

러브레터 속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

    다시 첫사랑 이야기로 돌아와서 첫사랑이 지금 자신의 곁에 없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첫사랑이 내 옆에서 방귀를 뿡뿡 끼고, 무심코 다 돌린 세탁기에서 그녀의 속옷을 꺼내서 널어야 하는 일을 마주해야 하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퉁퉁 부은 얼굴에 침 자욱이 있는 채로 내 눈에 들어온 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끔찍하다.

    물론 우리 록수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환상 속의 그녀는 환상인 채로 보존하는 것이 훨씬 아름답고, 그 아련함이 실체를 마주한 것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그래야만 예전 그 모습 그대로 그와 그녀를 추억할 수 있고, 내 환상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들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 이별 노래나 가슴 시리게 슬픈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그녀를 떠올리는 호사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보면 가끔 첫사랑 또는 옛사랑이 소재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들은 첫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져 육체적인 관계까지 자신들을 몰아가지만 결국에는 파국을 맞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아마도 해보진 않았지만 이게 현실이지 않을까?

    지금 내가 만난 그와 그녀는 예전의 그와 그녀가 아니고, 내가 세상에 찌든 만큼 나의 첫사랑도 싱크대 개수대에 때가 찌들듯이 세파에 찌들어 있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어느 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첫사랑인 그와 그녀를 마주치거든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도망쳐 버리기를 권하고 싶다.

    그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예전의 그가 얼마나 세상에 지쳐 상해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첫사랑의 기억은 내 기억 속에서만 아름답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모두 오늘은 온마음을 다해 추억 속 그와 그녀를 향해 외쳐보자.

    '오겡끼 데스카~, 와따시와 겡끼데스~'

#단상 #첫사랑 #어느새길어진그림자를따라서 #땅거미진어둠속을그대와걷고있네요~

오겡끼데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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