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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Aug 06. 2019

내 자리로 돌아와 까슬까슬한 낯섦을 다듬는다

#에세이

<내 자리로 돌아와 까슬까슬한 낯섦을 다듬는다>

    휴가든 휴직이든 방학이든 '내 자리'를 잠시 비우고 돌아오면 아주 미묘하게 느껴지는 낯섦이 있다.
    익숙한 내 공간이지만, 잠시간의 떠나 있음이 전해 주는 기분 좋은 낯설음이랄까.
    아무리 기분이 좋다고 해도 생활공간에서 낯섦을 유지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길든 짧든 외출에서 돌아오면 내 공간들을 돌며 삐죽삐죽 삐져나온 풀 머리를 잘라내듯 다듬질을 한다.
    마치 강아지들이 산책하며 자기 영역을 확인하듯이 말이다.
    
    휴가 후유증에서 벗어나려 주말인 일요일에도 출근했지만, 본격적으로 업무가 시작되는 것은 월요일인 오늘이다.
    아침 일찍 차를 몰아 도착한 사무실에서는 어김없이 기분 좋은 낯설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휴가 때도 늘 들고 다니던 노트북을 제자리에 놓은 뒤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뻐걱대는 모니터 잭과 연결해본다.
    노트북도 후유증이 있는지 조금 떠듬떠듬하더니 이내 원래 모습대로 자리를 잡는다.
    복귀 후 첫 기사의 초벌 원고를 오타투성이로 작성한 것도 낯섦 때문이리라 핑계를 대보고, 싹둑싹둑 신경 써서 다듬어 기사 작성창에 올려두었다.
    기사와 기사 사이 잠시 여유로운 시간이 오면, 자연스레 휴가 내내 책상 위에서 나를 기다린 다구(茶具)에 눈이 간다.
    보채는 듯한 다구의 자태에 홀려 요즘 즐겨 마시는 유기농 홍차 잎을 포트 물에 내려 마시면 한시름 놓이면서 찾아오는 안온한 이 느낌.
    
    이제 뭘 할까? 어디를 좀 다듬어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다가 늘 가야 하는 공항은 제쳐놓기로 하고, 사무실 근처 북한대사관을 떠올려 본다.
    밤새 세찬 비가 내려 여름날 같지 않게 시원해진 공기를 자전거로 지치며 달린다.
    얼굴에 촉촉한 공기가 닿으면서 '아. 돌아왔구나'하는 현실감이 쓱-하고 밀려들어 마음도 차분해진다.
    페달을 몇 번 밟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금세 북한대사관 정문에 당도해 있다.
    기웃기웃 둘러보니 대사관 게시판 사진들이 고사이 새로 바뀌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대사관 경비를 서는 무경(武警) 눈에 거슬리지 않게 기삿거리가 되는지 꼼꼼히 눈으로 확인한 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뜬다.

    그렇게 내 자리 중 한 곳의 영역 표시가 끝났다.
    오전 일과를 마쳤을 뿐인데 어느새 낯섦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내일은 공항에 나가 또 다른 자리에 낯섦이 무성해졌는지 살펴봐야지.
#내자리 #낯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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