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가시가 삶의 동력이 되는 것에 대한 단상

#에세이

by 돼지터리언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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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가시가 삶의 동력이 되는 것에 대한 단상>

'바울의 간질'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바울은 간질을 앓았다.

그는 생전에 자주 자신의 간질에 대해 언급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도에서도 그는 자신이 가진 육체적 병이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바로 잡아 준다고 고백하곤 했다.

성경에선 이런 캐릭터가 무지 많기 때문에 조금 상투적으로 들리지만, 내가 이 구절을 접했던 때는 나름 인생에서 고단한 시기를 지나고 있던 때라 상당히 위로가 됐다.


비단 바울뿐이랴.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가시'를 안고 산다.

나 같은 경우는 가족에 대한 책임, 가난, 불투명한 장래 등이 주로 가시 역할을 했었다.

이런 가시들은 개인을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삶을 살아내는 동력이 돼 주기도 한다.

흔히들 이런 가시를 '부담' 또는 '책임'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어깨에 짊어진 부담은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 멈추고 싶은 발걸음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게 하는 동기가 된다.

여기서 꼰대 같이 '고난을 견뎌라. 닝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가시가 없이 평탄한 삶을 살면 얼마나 행복하겠냐만은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최소 한두 개의 가시는 안고 산다.

그러면 가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하는 것이 좋을까.

자소서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인 표현을 하나 끌어와 보자.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겠습니다'

가시를 아픔으로만 여기느니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로 여겨 보는 것이다.

여기 멈춰 서서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느니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물론 이렇게 자기 최면을 건다고 해서 내 폐부를 찌르는 가시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이 고통의 고름이 쌓여 살이 썩을 것 같을 때 바늘로 고름을 터쳐 짜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종의 탈출구가 필요하다.

탈출구는 술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취미가 될 수도 있고, 클럽 같은 가벼운 일탈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술도, 친구도, 취미도, 일탈도 아녔다.

술을 먹자니 하루하루 사는 것도 힘든데 맨 정신을 유지 못 하는 게 두려웠고, 취미나 가벼운 일탈을 하자 해도 시간이 없었다.

물론 좋은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생존의 고민을 속 시원히 공감해줄 친구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종교에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10대 후반 이후 내 눈물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 적은 없는 것 같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한번 무너지면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될 것 같은 강박이 들어서였다.

한도 끝도 없이 미뤄지는 대학 입학에도, 진로를 급히 바꿔야 했던 졸업 시기에도, 몸이 아픈 순간에도 그랬던 것 같다.

겉으로 센 척은 했지만, 울화라고 할까 그런 것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내가 상정한 이상향에 자리한 신이라는 존재에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푸념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이렇게 감정의 배설물을 온통 털어 내고 나면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신발에 잔뜩 낀 진흙 덩어리는 조금 떼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는 힘을 얻었던 것 같다.


내가 종교를 택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영속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변치 않음.

내가 믿음을 유지하고만 있다면 그 자리에 항상 그 존재가 버티고 서 있다는 생각은 꽤 든든한 은신처가 돼줬다.

물론 훌륭한 친구도, 술도, 일탈도 이런 은신처가 돼 줄 수는 있지만, 문제는 사람도, 사물에 대한 호감도도 변하니 형이하학적 존재들에게 영속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정적인 은신처를 상정해 두고 그곳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고난의 터널을 지나는 사람이 있다면, 친구가 됐든, 술이 됐든, 일탈이 됐든, 가족이 됐든, 혹은 나처럼 종교가 됐든 나만의 은신처를 꼭 찾아 두길 권하고 싶다.

가시의 아픔은 참는다고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어딘가에 고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주기적으로 고름을 짜내지 않고 그 지난한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란 쉽지 않다.

가시를 내 삶의 동력으로 품고, 저 멀리 있는 신기루 같은 희망가를 부르는 것으로는 삶을 살아가기 부족하니 마음만 먹으면 얼른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는 은신처를 꼭 만들기 바란다.

내가 삶을 앙망하고, 달음질쳐도 곤비치 않으려면 잠시 숨 고르기 할 은신처는 없어선 안 될 비상식량이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가시도 사라지고, 시나브로 평안이 삶에 자리하게 되지 않을까.

-은신처인 키보드와 핫도그와 커피 앞에 앉아서 돼지터리언 흙진방 씀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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