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제안서를 쓰면 느낄 수 있는 것들>
자기 객관화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말이 한자어여서 그렇지 좀 풀어쓰면 '네 분수를 알라' 정도의 뜻이 되려나.
아무튼, 자기를 돌아볼 시간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기 객관화는 꼭 필요한 성찰 도구다.
자기 객관화는 입으로 또는 생각으로만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친구를 만나 내가 어떻고, 저떻고, 뭐가 문제고 다다다다 이야기해봐야 금방 잊고 말게 돼 있다.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멍하니 홀로 시간을 보낼 때 가깝게는 전날, 멀게는 몇 년 전 나의 행동과 선택을 돌아보는 것은 기억력의 한계로 인해 매우 단편적인 자기 객관화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자기 객관화가 될까.
내가 최근에 경험한 바로는 제안서를 써보는 것만큼 자기 객관화가 확실히 되는 것이 없다.
사실 대입, 취직의 관문에서 우리는 내 몸을 노예시장에 내놓는 '자소서'라는 제안서를 쓰지만,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 나에 대해 이런 종류의 글을 써볼 일이 거의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직할 때 서류 절차에 필요해 자소서를 써볼 수야 있지만, 이직은 대게 본인의 경력과 결과물을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때 작성하는 자소서는 정말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자소서를 쓰긴 쓰되 진정한 자소서가 되지는 않는 셈이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제안서를 써 보는 것이다.
우리 나이쯤 되면 여기저기서 제안을 받아 '내 것'을 남에게 내놓을 기회를 얻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관문이 바로 제안서다.
제안서라...
제안서는 자신의 저작이나 성과, 아이디어를 상대방에게 내놓고 설득하는 형식의 글이다.
제안서는 자소서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소개가 아니라 상대를 설득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기 때문에 목적성이 명료하다.
남을 설득하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나에 대해 명확히 아는 것이다. 장점은 물론이요, 단점도 확실하게 알아야 설득과 나의 약점을 파고드는 질문을 방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소서보다 조금 더 적극성을 띠는 글이기 때문에 내가 쥐고 있는 무기와 강점을 극대화해야 해 난도가 더 높다.
최근에 이 제안서라는 것을 써봤다.
그렇게 글을 쓰며 밥을 벌어먹고, 글을 즐겨 쓰는 나인데도 첫날은 한 자도 적어 내지 못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이렇게 쓰면 너무 뻔뻔하게 보이지는 않을지, 내가 가진 물건이 초라하지는 않은지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이건 자소서를 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인데 자소서는 사실 제안서와 비슷한 성질의 것이긴 하지만, 이름 그대로 나를 '소개'하는 것 아닌가.
제안서는 소개를 너머 남이 나에게 재화를 쏟아붓도록 해야 하므로 훨씬 적극적인 성격의 글이다.
그렇게 첫날을 보내고, 백지로 덩그러니 남겨진 제안서 앞에 앉아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이 일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1.이게 꼭 나에게 필요한가? 2.남들에게도 필요한가?
첫 번째 질문은 어찌어찌 힘겹게 넘어섰지만, 두 번째 질문 앞에 서자 다시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렇게 두 번째 날이 지났다.
며칠 바쁜 일이 있어 텀을 두고 다시 달랑 한 두 줄 써진 제안서 앞에 앉았다.
이번엔 밥이 되든 똥이 되든 뭐라도 되겠지 하는 생각에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글을 써보기로 했다.
처음엔 내 물건에 대한 소개, 그리고 다음엔 왜 이걸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이 물건의 장점 등을 써내러 갔다.
다 적어 놓고 처음부터 쭉 읽어보니 정말 끔찍한 글 한 편이 나와 있었다.
이건 10년 차 기자인 나에겐 수치스러움 그 자체였다.
과연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 이런 낯부끄런 글을 써낼 수 있는가 하는 생존에 관한 의문이 들 정도로 심각한 상태의 결과물이었다.
그날은 저녁에 나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앞서 생각한 1번 질문을 머리에 떠올렸다.
'이게 꼭 나에게 필요한가?' 술김에 나는 'NO'라고 답하고, 집에 돌아와 썼던 글을 다 지웠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구나 싶었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나를 둥기둥기 해주는 사람들을 찾아가 "나 이거 해도 될까?"라는 질문을 남발해 봤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기대와 정확히 일치했다.
내가 잘나서도 내가 잘해서도 내가 차고 넘쳐서 하는 소리는 아녔지만, 둥기둥기 해주는 반응에 기분은 다시 좋아졌다. 그리고 약간의 용기를 얻어 다시 제안서 앞에 앉았다.
그리고 조금은 차분한 어조로 제안서를 연성해 냈다.
다 쓰고 나서 느낀 소감은 이거였다.
'이런 똥을 세상에 내놔도 되나?'
될 대로 되라지 라는 심정으로 나는 1번 질문에 'YES'라고 답했고, 세상이 2번 질문에 'NO'라고 말하면 다 때려치우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심정으로 제안서를 전달했다.
넘기는 순간까지 문장을 가다듬었는데 메일을 보내고 나서 다시 보니 아직도 영 마음에 안 드는 부분투성이이었다.
제안서를 쓰는 내내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아직도 채워야 할 공간이 얼마나 많은지, 작은 재주에 우쭐하고 산 건 아닌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제안서에 '인실X'(인생은 실전이다 X만아)을 당한 느낌이었다.
혹시 겸양이 조금 부족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제안서를 꼭 써보기 바란다.
아주 물리적으로 맞는 것보다 더 피떡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