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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Sep 17. 2019

'터무니 만드는 건축가' 승효상

#대가와의만남

photo by Kim dongwook

<대가와의 만남> '터무니 만드는 건축가' 승효상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우리가 가끔 쓰는 이 문장 속 '터무니'라는 말의 정확한 뜻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터무니. 한자로는 '지문'(地文), 영어로는 'landscript'라고 한다.

    풀어쓰면 '땅의 자취' 또는 '땅의 흔적' 정도가 적당하다.

    이 터무니라는 말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는 한국 건축 대가가 있다.

    그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묘를 건축한 승효상 선생이다.

    베이징에 와서 알게 되거나 만났던 유명 건축가들의 특징이 있다.

    바로 작품에 자신만의 '철학'을 담는 것.

    이런 것을 보면 이과가 대접받는 세상이지만, 문과적 감수성이 없이는 대가의 반열에 들 수 없는 것이 또 엄연한 현실인 셈이다.

    서양에서 문사철 문사철하며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튼, 승효상 선생 역시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 건축의 지평을 넓히고 계신 분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터무니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승효상 선생의 건축 철학에 따르면, 서울을 비롯해 베이징, 상하이 등등 현대 대도시들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터무니가 많이 소실됐다.

    산을 깎고, 메우고, 평지를 만들고, 이 모든 행위를 통해 우리는 터의 무늬를 지워 가며 도시를 짓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 다시 말해 '터의 지문'은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빈 껍데기 같은 터무니 없는 건축물만 도시를 누더기 기우듯 채우게 됐다.

승효상 선생의 대표작 광고회사 웰콤 사옥

    승효상 선생은 좋은 건축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땅의 목소리를 듣고 또 하나의 무늬를 덧대주는 것이 바로 좋은 건축이다'

    스카이라인을 찢을 듯 치솟은 마천루를 세우고, 거대한 고철덩이 같은 랜드마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땅의 흔적을 잘 살려서 자연스럽게 옛것과 어우러지도록 터무니를 새기는 것이 바로 그가 추구하는 건축이다.

    흔히들 승효상 선생의 건축을 가리켜 '빈자의 미학'이라고 한다.

    승효상 선생님과의 대화와 특강을 통해 그에게 왜 이런 별칭이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는 서울에 마지막 남은 달동네가 있다.

    그가 이 달동네를 개발한 방식에는 그의 건축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다.

    승효상 선생은 달동네의 미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60년대 서울에 강제 이주한 달동네 주민들은 삽과 곡괭이로 마을을 일궜다. 삽과 곡괭이로 지었기 때문에 집(건축물) 자체는 허술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과 자연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 놓은 터무니를 보존하는 것이 포인트다.

노원구 중계동 달동네는 기존 방식의 아파트 재개발이 이뤄질 위기에 놓였었다.

    이를 위해서는 4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1. 지형을 보존하라 2. 터를 보존하라 3. 길을 보존하라 4. 생활 방식을 보존하라.


    언뜻 들으면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건축인지 한눈에 보인다.

    지형을 파헤치지 않고 최대한 보존하면서 전에 있던 너른 공터나 골목, 쉼터, 주민 공동 공간 등 터를 보존하고, 길을 그대로 살리고, 주민들의 생활 방식에도 변화를 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택지 개발하면 떠올리는 땅을 파헤치고 산을 깎고, 도로를 새로 내는 것이 아닌 옛 흔적들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덧씌우는 것이 승효상식 건축이다.

    그가 설계한 달동네는 이렇게 개발되고 있다.

    산자락에 자리한 동네의 지형을 깍아내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살리고, 길과 터를 보존하고, 생활 방식은 상점은 상점대로, 농경지는 농경지로, 양로원은 양로원으로 그대로 둔 채 원주민들이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고도 살아가게 개발하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오래된 건축물들 뿐.

    건축물은 사라지지만, 그 건축물들이 있던 공간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터무니'를 지키고 만드는 건축이다.    

    고층 건물을 세우진 않지만, 넓게 기존 건축 공간들을 활용하면서 용적률은 법규에 맞춰 채워진다.

    고층 건축물은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그는 주장한다.

    반대로 터와 길과 마당들을 보존하면 기존의 공동체를 유지하면 마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다.

그가 새롭게 설계한 중계동 달동네 개발 계획. 빨간 부분은 기존의 평면도, 검은색은 새롭게 설계한 평면도. 길과 공간의 차이가 거의 없다.

    '에이. 누가 그걸 모르나 비용이 많이 들고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지'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건축 철학을 적용하기 힘든 사례가 훨씬 많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유익한 철학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구잡이식 개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런 터무니를 만드는 건축 철학을 지향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영혼 없는 도시 개발 방식이 많이 바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중국 수도 베이징의 심장부인 첸먼다제(前门大街) 재건 마스터플랜을 맡았고, 보물 같은 예전 공간들을 그대로 살리는 설계를 해냈다.

    재료를 통일하고, 기존 공간을 살리고, 건물은 바뀌었지만, 땅의 흔적은 남겼다. 어쩔 수 없이 없앤 건물이 있다면 그 자리에 건물이 있었다는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그는 터의 지문을 보존하고, 새로 그어가며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물론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서둘러 프로젝트가 실행됐고, 이후에는 현대식 난개발로 인해 현재 첸먼다제는 자본주의의 괴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의 철학은 미약하게 남아 그곳을 지키고 있다.

나무를 그대로 둔 채 새롭게 건물을 지어 공간의 역사성을 살린 승효상 선생의 건축.

    노무현 대통령의 묘도 이와 같은 그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됐다.

    노 대통령의 묘를 설계한 그의 이야기는 크게 가슴을 울렸다.

    그는 노 대통령을 고전 서적인 오리엔탈리즘에서 정의한 지식인에 비유했다.

    '자신을 스스로 경계 밖으로 내쫓아 경계 안을 비판하고 대안을 내놓는 사람'

     그는 노 대통령을 대통령 때도, 국회의원 때도, 변호사 때도 경계 밖에 있던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죽음마저 경계 밖으로 던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봉화마을에 자리한 노 대통령의 묘는 승효상 선생의 건축 철학을 담아 노 대통령의 삶을 표현한 작품이다.

    일단 다른 대통령들의 묘와 달리 노 대통령의 묘는 낮은 곳에 자리했다. 땅 모양도 네모 반듯하지 않은 삼각형 모양을 골랐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에너지가 모인다는 종묘의 월대 바닥을 따다가 바닥을 꾸몄고, 바닥에 놓인 납짝한 돌에는 시민들의 추모사를 새겨 넣었다.

    묘지 터는 실제 마을의 지도를 그대로 카피해 큰길, 작은 길, 물길, 언덕, 마당을 만들어 표현했다.

    그의 방식대로 노 대통령의 묘 터에 터무니를 새겨 넣은 것이다.

     그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노 대통령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길 원했다.

위 노무현 대통령의 묘, 아래 기존 대통령들의 묘.

    승효상 선생의 건축 철학을 한 문단으로 정리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그는 강연 내내 입버릇처럼 건물을 땅에서 혹은 산에서 끄집어내듯 주변과 어우러지게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건물은 사라져도 터는 남는다. 건물 자체에는 어떠한 진실이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건축 속에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게 우리가 건축과 도시를 대할 때 가져야 하는 태도다.

불에 타는 노트르담 성당

#대가 #승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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