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때 국사를 좋아했다. 지금도 한국적인 것이 좋다. 누군가 왜?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냥 좋아해서라고 답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한의사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 또 왜?라고 묻는다면 그냥 좋아해서라고 답하겠다.
이 시절의 나는 한의사가 되고 싶었다. 간절하게.
그런데 세상은 간절함 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시에서는 나보다 성적이 더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떨어졌고, 수시에서는 대학이 요구하는 조건(최저등급)을 넘지 못해 떨어졌다. 이래나 저래나 다양한 방법으로 떨어졌다. 기억이 나는 건 내가 수능을 치고 얼마 뒤에 북한이 미사일을 쐈었는데, 그게 우리나라로 떨어져 전쟁이 나길 바랐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 다시 수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과 치기 어린 못된 생각을 했었다. 다 같이 망하는 전쟁이 나길 바랄 만큼 내 마음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져 있던 내 마음을 주워서 닦아주신 건 부모님 뿐이었다.
한 동안 내 마음을 닦아주신 부모님은 내가 교대에 입학하길 바라셨다. 아이들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취직 걱정도 덜하니, 덜컥 원서를 내고 교대에 입학했다. 교대의 생활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즐거웠다. 동기들과 술자리, 새내기에 언제나 관심이 많은 선배들.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MT. 19년 평생 해왔던 게 시커먼 남자들과 공부뿐이었던 나에게 모든 게 새로웠고 풋풋했다. 개강 시기의 나는 마음이 꽤 나 들떠있었다.
나는 내가 한의대에 떨어졌다는 사실도 잊은 채 대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아이들을 보는 것이 싫지 않았고, 동기들과 재미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여러 과목들을 배우는 게 싫지는 않았다. 심지어 교대 1학기에는 장학금도 받았다. 교생 실습도 그럭저럭 해내었다.
이 정도면 적성에 맞는 게 아닐까? 나에게 반문을 했다. 모두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괜찮지 않냐고. 그런데 개강이 지나고 몇 개월이 지나, 아무런 행사가 없는 나날들이었는데도 내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붕 떠 있었고 이리저리 부유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일이었고, 내 마음속에 좋아하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생 실습을 마친 느지막한 봄날, 따뜻한 저녁 공기가 내 몸을 휘감을 때 즈음, 나는 더 이상 붕 떠있지 않기로 했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바닥으로 스스로 내려왔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수능 특강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