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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Dec 25. 2020

9. 공간이 주는 위로

공간 충동

 오래전 한 남자 후배와 나눴던 이야기 한 토막.

“난 욕실이 힐링 공간이에요. 거기서 만화책도 보고, 신문도 읽고, 생각도 해요.” 그때만 해도 결혼한 남성의 심리엔 관심도 없었고, 공감도 할 수 없었던 내가 한 말은,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는 거 건강학적으로 정말 안 좋다고 하던데…”였다. 그러자 후배는 아내의 잔소리와 어린 자녀들과 놀아주는 데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기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욕실이라며 그 시간이 자신의 심리적 건강을 유지하게 해준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특성이 점점 흐려지면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느라 나름 고단한 가정생활을 이어가는 젊은 가장의 토로였다.     


그 후배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건 10년쯤이 지나 김정운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였다. 남자들의 도피 공간, 남자의 동굴 같은 개념을 설명한 글이었다. 디테일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조금 거칠게 설명하자면 여자들은 어떤 현안에 대해 그 자리에서 남자와 대화하고 종결하려 하는 반면, 말하기 기술과 생각의 속도에서 밀리는 남자들은 시간과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생각을 정리한 다음 대화하려 한다는 것. 그러니 여자는 항상 남자가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고 생각해 비난 투로 말하게 되고, 그런 투의 말을 들은 남자는 더 위축돼 얼른 그 자리를 피할 궁리만 하게 된다. 그 후배에게 욕실은 단순히 씻고 배설하는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열렬히 사랑하고, 끝까지 지켜주고 싶어 결혼한 아내의 목소리는 해가 갈수록 커지고 그런 아내에게 비난받는 게 일상이 되면서 소심하고 작아진 한 존재가 스스로를 다독이고 축 처진 어깨를 펼 수 있는 공간, 그런 의미에서 그 공간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김정운 교수는 그런 치유와 회복의 공간을 ‘공간 충동’, 독일어로는 슈필(놀이)과 라움(공간)을 합친 ‘슈필 라움’으로 설명한다. 어린 시절, 조금은 억울하게 엄마에게 혼났을 때 그런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난 생채기가 아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아파트 주거문화에선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주택엔 그런 순간에 위안을 주던 다락방이 있었다. 한쪽 벽면에 각 15cm 정도 두께의 스펀지 깔개가 3단으로 접힌 채 깔려 있었고 어떨 땐 홍옥 사과나 귤 궤짝이 입구 쪽에 놓여 있기도 하고, 때로는 아버지를 위한 흑염소 진액이 든 찜통이 놓여 있기도 했다. 그 다락방의 알록달록한 커버를 씌운 스펀지 요를 침대 삼아 울다가 잠들기도 했고, 거기 누워 어두운 조명 아래서 책을 읽기도 했다. 스펀지 요는 눈물 자국으로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지만 그 자국조차도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됐다.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공간이, 무릎이 꺾인 한 인간을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마법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김정운 교수는 종편 프로그램 ‘자연인’을 공간 충동 개념으로 해석한다.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조금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만의 동굴을 찾아 나선 게 바로 자연의 품이란 것이다. 돈이나 권력을 쟁취하는 데 지쳤거나, 그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을 구축한 게 자연인들이 얼기설기 짓거나, 혹은 오랜 시간을 투자해 지은 곳, 그게 바로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정운 교수의 ‘미역창고(美力創考·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 사고를 한다)’는 그런 공간 충동에서 시작되고 지금도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한쪽 벽면은 바닷가로 난 통창, 맞은편 벽면은 그림들이 걸린 갤러리, 또 다른 벽면은 책꽂이로 돼 있다는 그의 창고는 많은 남자의 로망이 되리라. 결혼을 하고 보니 내게도 공간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 결혼 전엔 내가 사는 집이 슈필 라움이었으나 가족이 생기고 나니 집은 더 이상 슈필 라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슈필 라움을 꿈꾼다. 꿈꾼다고 모두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꿈꾸지 않으면 가능성 제로지만 꿈꾸는 순간, 그 가능성은 50%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어제도 꿈꿨고, 오늘도 꿈꾼 것처럼 내일도 꿈꿀 것이다. 비록 거창하진 않아도 글을 쓰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깊어질 수 있는 방을.     


그러다 갑작스럽게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연락을 받았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집을 구했다. 이사한 지 2년 5개월 만에 다시 이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삶이 재미있는 건 계획대로 되는 일만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뜻하지 않은 일을 겪어내는 데 있을 것이다. 그 뜻하지 않은 이사로 나는 공부방을 갖게 됐다. 안방을 차지하면서 욕실까지 독차지하게 됐다. 집 안에 나만의 슈필 라움을 갖게 되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사하느라 몸 고생, 마음고생, 엄청난 이사 비용 등으로 불편했던 마음이 나만의 슈필 라움에 안기는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이게 바로 공간이 주는 위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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