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가을날 만난 그림책

― 『두 갈래 길』 by 라울 니에토 구리디

by Jasmine

어느새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 거울 속 내 머리에 내린 서리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시도, 글도 곁을 주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갈수록 작아지던 가을날, 내 눈에 띈 그림책 수업. 그곳엔 나처럼 친정엄마를 떠나보내고 애도의 여정에 있는 중년 여성들과 아이를 돌보느라 직장을 그만둔 젊은 엄마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중년과 좋아하는 일을 그만둬야만 했던 젊은 엄마. 생애의 시기는 달라도 뭔가를 잃거나 놓아야 하는 아픔의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내 의지로 일을 그만뒀는데도 엄마와 일이 동시에 나를 떠난 듯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림책이 삶의 칼날에 베인 듯한 통증을 지그시 눌러주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읽지 못한 그림책이 중년의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몇 장 되지 않는 그림책의 장면 장면, 글 한 줄 한 줄이 내가 살아온 날들의 어떤 경험과 맞물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그림과 그림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빈틈은 읽는 사람의 경험치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겐 유쾌한 기억을 소환하는 장면이 누군가에겐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버튼이 되기도 했다. 그림책 속을 흐르는 감정들은 마치 점토처럼 누군가에겐 어린 날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기차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그 옛날 아빠가 퇴근길에 사다 준 따끈한 찐빵이 되기도 할 것이다.


2018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인 『두 갈래 길』은 스페인의 라울 니에토 구리디 작가가 그리고 썼다. 그림책엔 각각의 길을 걸어가는 여자와 남자가 나온다. 두 갈래 길은 두 개의 선택지로 읽힐 수도 있지만 내게는 우리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개의 존재 방식에 가까워 보였다. ‘어떤 길이 맞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살고 싶은가’를 묻는 듯하다. 결국 이 둘은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리듬으로 보인다. 두 갈래 길이 서로 교차하거나 여자와 남자의 시선이 닿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둘 중 하나로만 사는 게 아니어서일 것이다. 이 길에서 저 길로 꺾어지기도 하고 때론 지름길을 두고 돌아가기도 하는 인생의 비유로 읽히는 이유기도 하다.


두 갈래 길

라울 니에토 구리디


인생은 길과 같아.

길 위에는 신기한 것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고,

잠시 멈춰 고민에 잠길 때도 있어.

가끔은 굉장히 빨리 지나가.

반대로 너무 느릴 때도 있지.

밤처럼 온통 캄캄할 때도 많지만

장애물이 나타나기도 하지.

그래도 걱정은 마, 뛰어넘으면 되니까.

친구와 다투기도 할 거야.

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말없이 걸어야 할 때도 있어.

이 모든 길들이

너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그 순간

인생은 ……

찬란해지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빛나는 순간이 과연 있었을까 싶지만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때로는 엉뚱한 길로 빠지기도 했고, 갔던 길을 오래 되돌아 나온 적도 많았다. 내 두 발로 걸어서 닿은 곳이 바로 지금 여기의 나다. 그림책의 맨 마지막 장면에선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첫 장면에선 열려 있던 남자의 녹색 집 문은 닫혀 있고, 여자의 핑크색 집 열린 문 옆엔 남자의 모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지붕 위엔 ‘찬란해지지.’란 다섯 글자가 쓰여 있다. 내 안의 두 존재, 혹은 서로 다른 꿈이나 욕망이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은 찬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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