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밤의 선물
며칠 전 남편이 음악회를 예약했으니 금요일 저녁 시간을 비워놓으라고 한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다음 주인가 싶었는데 17일 오늘이었다.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 조금 일찍 퇴근한 남편과 이른 저녁을 먹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클래식 음악회에 가는 줄로만 알았다.
저녁을 서둘러 먹고는 옷장 문을 열어젖히고 초여름 밤 음악회에 알맞은 옷이 있는지 빠르게 스캔했다. 정장 차림이 불편해 잘 사지도, 잘 입지도 않으니 하나같이 도리질이 나왔다. 요가복이 외출복이 된 지 오래인지라 옷은 물론이고 가방도 마땅한 게 없었다. 남편의 재촉에 서둘러 블라우스에 정장 바지를 입고 거실로 나왔더니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인 남편은 뜨악한 얼굴이었다. “영화관 가는데 편하게 입어요”라는 말에 음악회 아니냐고 물었더니 위성 중계한 걸 영화관에서 보는 거라고 했다.
요즘 내가 그렇다. 휴직한 지 몇 개월 만에 언제 완벽주의자 팀장이었나 싶게 변한 내가 나조차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정신이 빠진 듯 도통 타인의 말을 온전히 새겨듣지를 못한다. 분명 남편은 빈에서 하는 음악회의 위성 중계를 영화관에서 보는 거라고 말했는데 나는 ‘음악회’만 머리에 넣은 것이었다. 다시 더없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메가박스로 갔다.
‘위성 중계’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자주 들을 일이 없어서 그런 거라며 내 주의력 부족 따위는 너그러이 잊었다. 아, 얼마만의 영화관 방문인가? 3년쯤 된 듯하다. 빅사이즈 팝콘과 음료도 사 들고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 기분을 제대로 냈다. 영화도 아니고 음악회도 아닌 위성 중계라서인지 관객은 30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앞의 서너 줄은 아예 관객이 없고 나머지 줄도 2~6명 정도가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금요일 저녁 영화관 풍경치고는 썰렁했으나 모처럼 영화관에 앉은 나는 그조차도 절로 거리 두기가 돼 좋았다. 피곤이 몰려올 저녁 8시였지만 위성 중계가 시작되고 나니 설렘으로 눈과 귀가 한껏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답게 여름 초저녁의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궁은 그 규모나 고전미가 특별했다. 촬영기술의 발달로 쇤브룬궁의 전체적인 조망과 디테일한 정원을 함께 볼 수 있어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하긴 그전부터도 음악회나 공연을 보러 갈 때면 1층이 아닌 2층 앞줄을 선택하곤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무대가 들어와 더 비싼 1층 좌석보다 훨씬 다양한 장면을 보고 즐길 수 있어서다.
위성 중계는 그보다 훨씬 많은 볼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악기 연주자 각각의 손놀림과 표정까지 보면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어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들었다. 연주가 한 곡 한 곡 이어질수록 빈의 하늘도 함께 어두워지면서 붉은색, 보라색 등 색색의 조명이 교향악단을 에워싸며 빛났다. 초여름 밤의 쇤브룬궁 풍경과 그곳의 관객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서 음악을 감상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한국의 영화관에서 그 순간을 함께하는 나. 국적도, 인종도, 사는 곳도 다른 사람들이 음악으로 하나 되는 기분. 2년이 넘는 거리 두기 기간의 갑갑함과 파편화된 듯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양한 연주곡(‘이별의 왈츠’ ‘교향악단을 위한 탱고’)들이 채워주는 듯했다.
올해의 주제는 ‘유럽의 공통 유산’으로, 유서 깊은 전통을 지닌 유럽 작곡가들의 음악을 선보였다. 특히 라트비아 작곡가 아르투르스 마스카츠의 교향악단을 위한 탱고는 클래식 음악회의 분위기를 초여름 밤에 걸맞게 발랄하게 띄웠다. 그보다 앞서 우크라이나 작곡가 미콜라 리센코의 작품이 최초로 공연됐는데 아마도 현재진행형인 우크라이나 전시 상황에 대한 지구촌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한 것 같았다.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는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표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가 크게도 떴다가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이마의 주름까지 동원해 지휘를 하는 듯했다. 그러고 만난 고티에 카퓌송의 첼로 연주는 때로는 감미롭게, 때로는 파워풀하게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첼로 현 위에서 이어지는 카퓌송의 손놀림과 그의 표정은 악기와 사람이 하나가 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쇤브룬궁의 전경과 정원 풍경, 마지막 왈츠곡 연주가 시작되자 궁전 정원 뒤쪽에 서서 감상하던 사람들이 한두 커플씩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젊은 커플, 중년 커플 할 것 없이 모두 더없는 순간을 누리는 듯 보였다. 110여 분의 음악회는 금세 끝이 났다.
음악회의 여운과 아쉬움은 영화관을 나와서도 이어졌다. 마침 영화관 앞 나무 덱엔 둥근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어 빈 곳을 찾아 앉았다. 우리 옆엔 외국인 교환학생들로 보이는 8~9명의 청년들이 모여 앉아 안전한 우리나라의 초여름 밤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도 시원한 밤공기를 즐기며 카퓌송의 첼로 연주와 그의 표정 연기를 되새김질했다. 오랜만의 밤 외출, 연주도 좋았고 날씨도 더없이 좋았다. 이제야 코로나 이후의 삶이 시작된 듯하다. 행.복.하.다.고 소리 내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