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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ul 29. 2022

46. <8월의 크리스마스> 리뷰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의 공존

1998년에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 우리에게 이런 방식의 사랑이,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2022년 여름이다.   

   

어느 더운 날, 친구 부모님 장례식에 다녀와 지친 정원에게 주차 단속 사진 현상을 재촉하는 다림. 약간은 무례한 듯 보이는 다림에게 오히려 정원이 사과하며 내민 아이스바. 그렇게 안면을 튼 후 다림은 한 마리 새처럼 수시로 사진관으로 날아든다.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로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첫사랑 지원을 보는 정원은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장면에서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란 김창완의 노래가 나오고 정원의 독백이 이어진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내게 자신의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정원의 첫사랑은 그제야 끝이 난다.

    

요즘의 사랑은 직설적이고 즉각적이다. 강렬하고 진도 빠른 사랑이 너무 흔해 때론 멀미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은데도 다림을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 짓는 정원의 모습은 답답하다. 왜 마냥 느긋할까. 아니었다. 그런 정원이 술자리 시비로 끌려간 경찰서에서 “내가 왜 조용히 해야 돼?”라고 목청을 높이는 장면은 “내가 왜 이렇게 빨리 죽어야 돼?”라는 억울함의 토로로 읽혔다.  

    

정원이 다림의 우산을 쓰고 걸었던 날, 퇴근하고 사진관에 오겠다고 한 다림을 정원은 오래 기다린다. 다림은 오지 않고 제상에 놓을 사진을 찍겠다고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가 찾아온다. 죽음이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은유하는 장면이다. 그날 밤, 번개와 천둥소리에 깬 정원은 아버지 방으로 가 잠든 아버지 옆에 눕는다. 반세기를 넘게 산 나도 때로는 엄마 품이 그립다. 그 엄마가 병원에서 투병 중이라 아무리 천둥 번개가 쳐도 나는 엄마 품을 파고들 수 없어 더 슬펐던 장면이다. 홀로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보다 앞서 떠나야 하는 아들의 마음이 어떨지,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다.    

  

사진관 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보는 세상, 카메라 렌즈를 통해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 자신이 오래 이 세상에 머물 수 없음을, 가족과 친구들과 오래 함께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시종 정원의 표정은 담담하다. 동창 모임 후 사진관에서 동창들과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눈시울이 붉어진 동창들과 달리 정원만 슬픔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런 정원도 또다시 혼자 남을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가르치면서, 몇 번의 설명에도 숙지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잠깐 언성을 높인다. 결국 비디오 작동법을 글로 쓰는 정원, 마치 유서를 쓰는 것 같았다.

    

살아 있다는 건 비를 피해 우산을 쓰거나, 식사한 후 설거지한 그릇들을 물이 잘 빠지게 엎어 놓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그 많은 사소함 사이 사이에 사랑이 있고, 이별도 있는 게 아닐까.   

  

처음 화장을 하고 사진관에 온 다림은 아이스크림이 아닌 맥주와 오징어를 놓고 정원과 마주 앉는다. 놀이공원 가고 싶은 마음을 감추려 하지만 앳된 얼굴로 어설프게 본심을 드러낸 다림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간 정원. 놀이기구를 타고 난 뒤 벤치에서 기다리는 정원을 향해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걸어오는 다림을 보면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순간은 햇살보다 빛나는 게 아닐까 싶다. 한층 가까워진 두 사람, 그날 저녁 귀갓길에 다림은 정원에게 슬그머니 팔짱을 낀다.     


그러나 삶은 참 야박하다. 시간은 정원의 편이 아니다. 한밤중 이불을 덮어쓰고 우는 정원과 방문 밖에서 아들의 울음을 듣고 선 아버지. 젊은 시절 아내를 잃고 늙어서는 하나뿐인 아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운명. 그럼에도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삶의 어디쯤에선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된다. 기가 차고 어이없어 눈물도 나오지 않는 그런 순간 말이다. 부모님 모두 와병 중이어서일까. 살아 있음에도 때로는 죽을 만큼 무섭고 고독한 순간이 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고,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도리질해 보지만 두려움은 쉬 물러가지 않는다.      


결국 정원은 쓰러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림은 사진관에 여러 번 헛걸음한 후 편지를 사진관 문틈에 끼워 넣는다. 그래도 연락이 없자 문틈에 낀 편지를 빼내려다 실패하고 며칠을 기다리던 다림은 불 꺼진 사진관 유리창에 돌멩이를 던진다. 첫사랑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고 사라진 정원에 대한 귀여운 복수가 안타까웠다.  

    

퇴원 후 다림의 편지를 읽은 정원은 답장을 쓴다. 다림이 옮겨간 지역의 커피숍에서 기다리다 창밖의 다림을 발견한 정원은 유리창에 바짝 붙어 다림의 움직임을 눈과 손으로 따라가며 그리워하지만 다림 앞에 나서지 않는다. 다림에게 쓴 편지는 부쳐지지 못하고 다림의 사진, 편지 등과 함께 상자에 담긴다. 그러고 사진기 앞에 앉아 자신의 영정사진이 찍히는 순간 살짝 미소 짓는 정원. 그렇게 그는 떠난다. 다림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고, 자신의 마음을 다림에게 보여주지도 않은 채.

      

눈 내린 겨울날, 소녀 티를 벗고 멋진 차림으로 초원사진관을 찾은 다림은 사진관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 수줍게 웃는다. 그러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떠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정원의 뒤늦은 고백은 다림에게 전해지지 못했지만, 그랬기에 다림은 첫사랑에 대한 상처 없이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게 정원이 다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을까.  

    

<8월의 크리스마스>는 8월의 뜨거운 태양과 크리스마스의 눈을 통해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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