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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Aug 14. 2022

48. ‘물끄러미’ 바라본 그대에게

―베로니카에게 하지 못한 말

베로니카, 예수님 얼굴의 피땀을 닦아주던 여인.

그 이름의 그리스 어원은 승리를 가져오는 사람,

라틴어 원뜻으로는 참된 이미지를 간직한 사람이라지.

신실한 “쏭”에게 더없이 맞춤한 세례명이군.     


40대 중반 여인이 그런 맑은 눈빛을 가질 수 있다니,

베로니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내 눈은 나이보다 너무 앞서 탁해진 건 아닐까 싶어 자꾸 내 안을 살피게 돼.

그런 베로니카를 또 울리고만 난 선배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을까.

내가 사직 의사를 번복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베로니카.

그걸 알면서도 나는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

내 안에 더는 일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질 않아. 에너지가 바닥났거든.     


황금 같은 금요일 오후를 내게 할애하러 오는 베로니카를 기다리던 어느 금요일,

베로니카가 타고 올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서 있던 내 등 뒤에서

“선배” 하며 베로니카가 나타났을 땐 “아니 왜 거기서 와?”란 물음이 튀어나왔지.

약속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한 베로니카는 한 할머니의 통사정을 뿌리치지 못했지.

아파트 청약 모델하우스로 사람들을 데려가기 위해

손에 부피만 큰 사은품을 들고 베로니카의 앞을 막아선 할머니,

베로니카는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오늘 한 명도 손님을 보내지 못했다며 울상을 지었다지.

그 말에 근처 모델하우스로 가 전혀 간단하지 않은 설명을 듣고

이름을 올려놓고 겨우 빠져나온 베로니카.

사은품을 가져가라는 할머니에게

부피가 커서 못 가져간다며 도로 사정을 했다는 말에 미소가 지어졌어.

베로니카는 그런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어서 사랑하고, 그런 사람이어서 걱정되기도 해.

   

우린 만나기만 하면 묶어놓았던 이야기보따리 끈이 풀려버린 듯 너무나 할 말이 많지.

서로에게 궁금한 것도 많고, 알려줄 것도 많고, 속상해 풀어놔야 할 것들까지.

그러나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에겐 우리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지.

베로니카를 더 붙잡아두지 못하는 건,

아직 초등, 중학생인 두 아들에게 베로니카가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야.

그 두 녀석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보내고, 먹거리를 보내곤 했던 것도

베로니카를 잠시라도 뺏은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이야.

게다가 아이들 아빠에게 베로니카는 아내이기만 한 게 아니라 영적 친구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베로니카와 만나는 시간은 귀하디귀한 시간인 거지.     


커피숍에서 30분 같은 2시간여를 보내고 찾은 식당.

베로니카가 나만큼이나 가지튀김을 좋아한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둘이서 달걀토마토볶음밥은 또 얼마나 달게 먹었던지.

신촌 거리를 걸으며 베로니카는 연애 시절을 떠올렸지.

1인 다역을 해내느라 추억의 거리를 거니는 여유조차 갖지 못한 베로니카.

지하철역으로 가야 하는데도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우리는 서점으로 들어갔지.

베로니카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고서야 지하철역으로 향할 수 있었어.  

   

반대 방향의 개찰구로 들어간 뒤에도 등을 보이지 못하고 손을 흔들고 서 있는 베로니카.

그런 베로니카를 보며 마주 손을 흔드는데 왜 가슴이 뜨거워졌을까.

사는 동안 지하철역에서 그렇게 애틋하게 내게 손을 흔들었던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곳에서 오래 손을 흔들며 서 있는 베로니카.

사랑은 이렇게 가슴 뻐근해지는 거라는 걸 투병 중인 엄마 대신 알려주려는 거야?

결국 먼저 돌아선 난 눈물을 후드득 흘리고 말았지.   

  

몇 년 전, 베로니카가 두 아들을 제대로 돌보고 싶다며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회사를 그만두려 했을 때 그걸 막은 건 나였지.

온갖 이유를 들이댔지만, 결국은 나를 위해서였다는 걸 이제야 고백해.

회사에 단 한 사람,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해주는 베로니카가 없었다면

내가 20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그랬던 나였기에 나의 사직은 베로니카에게 더 큰 충격이었을 거야.

베로니카를 매일 보지 못하는 괴로움과 보기 싫은 사람들을 매일 봐야 하는 괴로움.

그 둘 중 나는 전자를 택하고 말았어. 베로니카, 정말 미안해.    

 

이제 나는 베로니카의 두 아이가 얼른 커서 대학생이 되길 기도해.

베로니카, 몇 년 전 약속 잊지 않았지?

둘째가 대학시험 치고 나면 둘이 제주 여행 가기로 한 거.

7, 8년 후면 내가 할머니가 돼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기꺼이 나이 먹을래. 나이만큼 지혜도 풍성해지게 기도할게.

그때를 위해 요가도 더 열심히 할게.

베로니카, 그날을 위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회사에서도 잘해나가길 빌어.  

   

집으로 돌아와 베로니카가 보낸 톡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봤어.

“선배의 존재가 고마워요. 제가 선배 정말 좋아해요~”

눈물이 또 흐르네. 갱년기가 정말 오래가나 봐.

베로니카, 다음에 만날 땐 우리 같이 사진도 많이 찍어두자.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우리의 우정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게 말이야.

베로니카, 그날 하지 못한 말, 이제야 할게.

“사.랑.해.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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