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한번 꽂히면 끝까지 간다?!
―1주 1글 하기
뭐든 익숙한 걸 좋아하는 나는 좀처럼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익숙한 길로만 다닌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가 나를 미행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동선이 너무 뻔해서 심심해할 정도지 싶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한번 꽂히면 같이 다니는 사람이 질릴 지경이 되도록 그 식당만 간다. 어쩌다 친구 제의로 새로운 식당에 갔다가 꽂히면 그때부터 새로운 단골이 된다.
예전 회사 근처 한정식 식당에 꽂힌 나는 일주일에 사흘이나 그곳에서 점심 약속을 잡은 적이 있다. 게다가 그중 하루는 저녁까지 그곳에서 먹었다. 물론 내 앞에 앉은 친구는 모두 달랐지만 말이다. 얼마 전 퇴사한 회사 주변엔 나만의 맛집 지도와 함께 식당마다 정해진 메뉴가 있었다. 가령 쌀 국숫집에선 해물 쌀국수, 일식 돈가스집에선 새우 나베 정식, 파스타집에선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고르곤졸라 피자, 일식집에선 연어초밥, 중국집에선 무조건 자장면, 커피는 별다방 디카페인 라테. 회사 근처로 날 만나러 오는 절친들은 내가 일 때문에 점심 약속에 좀 늦더라도 알아서 미리 주문해두곤 했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은 집 근처에 새로운 맛집 지도를 만들고 있다. 요즘엔 집 근처 대만 식당의 달토끼(달걀 토마토 볶음의 준말, 두두니 작가님 글에서 슬쩍)에 단단히 꽂혀 있다.
결혼 초기 남편은 뭐든 한번 꽂히면 계속 반복하는 내 성향에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남편은 아침저녁 출퇴근길도 이리저리 코스를 바꿔 다니고, 모닝커피도 이곳저곳 다양한 커피숍을 찾아 즐기는 사람이었다. 난 어떤 식당의 특정 음식에 꽂히면 오늘, 내일 이어 먹어도 맛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일주일 전에 다녀온 식당조차 오늘 선택지에선 빼놓을 정도로 같은 것, 반복되는 것을 싫어했다. 나의 이런 성향은 싱글일 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사소한 듯하지만 때론 사소하지 않은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회사 일 말고는 요리도 청소도 빨리,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매일 저녁 메뉴를 바꾸는 일은 고역이었다. 심지어 영양사 출신인 내가 그러리라곤 남편은 물론, 나조차도 몰랐다.
싱글 시절 집안일은 되도록 하지 말자는 모토로 살았기에 청소와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저녁은 회사 식당에서 먹고 퇴근했다. 퇴근 후부터는 모든 시간이 쉬는 시간이었다. 청소는 주말에만 하려고 마음먹었기에 애초에 어지르질 않았다. 식생활 또한 단순했다. 영양소를 고루 갖춘 나만의 비법 주스를 위해 블루베리, 삶은 달걀, 우유, 바나나, 깐 호두가 떨어지지 않았다. 주말엔 간단히 두 끼만 먹으니 그림 배우러 다닐 여유도 있고, 친구랑 놀러 다니기도 좋았다. 집에선 바쁠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모든 게 달라졌다. 집은 조금 넓어졌는데 짐은 2배가 돼 뭘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두서가 없었다. 제대로 된 밥상을 받기 어려워진 남편도, 퇴근 후 집으로 출근하는 기분이 드는 나도 서로 다른 부분을 맞춰나가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보다 늦게 철들어 결혼한 덕에 적응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 또한 내가 잘 적응했다기보다 남편이 일하는 아내에 대한 배려가 많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집 안팎의 여러 일로 체력 방전에 시달리다 결국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12시간을 회사에 묶여 있었던 만큼 12시간의 여유가 생기리라 생각한 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갑자기 생긴 12시간의 여유 중 단 2시간 책 읽고 글 쓰는 루틴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일주일도 안 돼 두 손을 들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건 순간이었다. 그동안 회사 일을 위해 눈을 아끼느라 담을 쌓아 왔던 드라마(그것도 몇 년 전 드라마)를 어쩌다 클릭 한번 잘못해 한 꼭지 본 게 그 시작이었다. 어쩜 이리 재미있을까 감탄하며 뒤늦게 정주행에 빠져들었다. 몰입해서 볼 때는 좋았는데 마지막 회까지 보고 나니 도통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내 머릿속에선 이미 몇 년 전에 끝난 드라마의 다음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만든 스토리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잠깐 정신이 들어 창밖을 보면 이미 해 질 무렵, 남편의 퇴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역시 드라마는 보는 게 아니었다. 한번 재미 들리면 끝을 보게 하는 K-드라마의 위력과 하나만 들이파는 내 성향이 결합하는 순간, 하루 10시간이 사라지는 일은 계속될 게 뻔했다.
눈이 브레이크를 걸어준 게 천만다행이었다. 며칠간의 휴지기로 아픈 눈을 좀 쉬고 나니 다시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말그릇』(김윤나)을 읽는데 자꾸 마음속 어딘가가 따끔따끔 찔렸다. 나의 말그릇은 얼마만 할까. 행여 간장 종지만 한 크기여서 담아두는 말보다 내뱉는 말이 더 많지는 않았나 하는 부끄러움이 먼저 밀려들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큰 말그릇으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감정)을 온전히 받아주기보다 내 필요와 요구를 쏟아내는 데 급급하진 않았나 하는 돌아봄의 시간이 찾아왔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내 말그릇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계속됐다. 마침 퇴근한 남편의 얼굴을 보는데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말로 나를 이기지 못하는 남편이 열 번, 백 번 지는 쪽을 수용한 건 내가 옳아서도, 잘나서도 아니라 아픈 나를 품어준 것이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시작할 땐 통통 튀지는 못하더라도 좀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글을 쓰리라 작정했건만 세상일 어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쓰다 보니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애초에 쓰려던 얘기는 그게 아닌데, 그래도 어쩌랴. 하루를 계획하고 삶을 설계하는 일은 내가 하지만 그 끝은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걸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이는 중이다. 며칠 사이에 깊어진 가을, 그동안의 긴 게으름에서 벗어나 다시 글 쓰는 데 꽂혀 1주 1글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