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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Oct 29. 2022

51. 질문할 용기

―문제는 사투리가 아니라 차별의 언어

얼마 전 지인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가 있는 3호선의 한 역에 내린 적이 있다. 지난 20년 동안 내 생활반경에서는 거의 올 일이 없었던 그곳엔 상경 후 입사한 예전 직장이 자리 잡고 있다. IMF 사태로 직장을 잃고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처음 직장생활을 했던 곳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타고난 졸보인데도 낯선 서울살이 걱정보다는 새로운 직장생활 2막에 대한 설렘이 더 컸던 시절의 해프닝이 떠올랐다.

     

내가 일하게 된 부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고, 이미 적지 않은 경력이 쌓인 30대였기에 적응하는 덴 별 어려움이 없었다. 생기 넘치는 내 부산 사투리가 우리 부서에 꽤 신선한(?) 충격을 줬다는 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알게 됐다. 우리 부서엔 이미 경상도 출신의 남자 선배가 무게를 잡고 있었는데 서울살이 연차가 꽤 쌓여서인지 그는 경상도식 서울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선배는 업무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고 성실함 또한 다른 선배들을 압도했다. 그와 같은 야간 근무 조가 아닌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내 입사 축하를 겸해 그 선배가 동료 두어 명을 끼워 점심을 사게 됐다. 그 자리에서 내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내가 선배와 단둘이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이런저런 여담 중에 ‘갯가 여자같이 안 보인다’ 어쩌고 ‘말띠 여자’ 저쩌고 하는 말이 선배 입에서 나왔다. 물론 난 바다가 있는 부산에서 말띠 해에 태어났으니 팩트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말띠‧범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 갯가 여자는 헤프다, 바닷바람과 복사열 때문에 피부가 거칠고 검다 등의 편견과 비하의 말들이 오가곤 했다. 그 편견대로라면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결혼도 못 했고(난 안 한 거였지만),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나는 팔자가 드센 여자에 부합했다.      


그런데 그땐 새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된 2000년이었다.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좋은 것들 다 놔두고 왜 그런 차별‧비하의 말을 남발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고향 어르신들의 술자리에서나 들었을 법한 철 지난 이야기를 사회인이 돼 반복한다면 그를 과연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록 사투리는 구사할지언정 말 같지 않은 말을 가려 쓰는 데 자부심을 느끼던 나로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언어폭력이었다. 그러나 오후 업무 시간이 임박한 상황이어서 일단 사무실로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았으나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죄 없는 컴퓨터 모니터만 노려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회사 로비로 내려와 전화로 선배를 불러냈다.   

   

금방 밥 사준 후배가 로비로 내려오라고 하니 선배는 무슨 일인지 의아함 가득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평상시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로 선배를 보며 물었다. “선배, 내가 왜 선배를 불러냈는지 모르겠어요?”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 내게 선배는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다. 모르쇠 전략을 쓰려는 것 같았다. 결국 내 참을성이 무너졌다. 갯가 여자 같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후배가 정색하고 던지는 질문에 선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 누군가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해명을 듣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소다. 하지만 그걸 고려할 만큼의 여유는 내게 없었다. 주변을 의식한 선배는 변명 같은 해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가 내뱉은 문장들을 되새기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물었다. 어느새 선배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피부가 하얘서 칭찬으로 한 말이라는 둥, 자기 아내도 말띠라는 둥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그를 무섭게 쏘아봤다. 결국 그는 잘못했다며 사과했다. 사과를 받은 후에야 선배에게 다시는 그런 지역 차별, 성 차별적 언어는 쓰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 일 이후 내가 2년 만에 회사를 옮길 때까지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 그 회사를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같은 업종에서 일하다 보니 다른 선후배들의 애경사에서 그 선배를 간간이 보게 된다. 인연이란 게 이렇듯 간단치 않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내뱉을 수 없는 이유다.  

   

30여 년의 직장생활 동안 한자리에서 여럿이 들은 말도 듣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른 경우를 숱하게 경험했다. 하지만 열 명의 청중 중 단 한 명이라도 비하와 차별받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 말은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차별의 말이 난무하던 때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났다. 체감상 내가 있는 물리적 공간에선 거의 사라진 듯한 차별과 비하의 말들은 인터넷이란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지역 차별, 성차별, 세대 차별,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비하하는 발언들은 20년 전보다 더 노골적이고 격렬하다. 지방 출신의 중년 여성으로서 극단적인 대립의 글들을 보면 두려움이 몰려오곤 한다. 이의 제기 한번 잘못했다가 더 큰 봉변을 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사유하고 쓰는 일만큼은 놓지 않으려 한다. 사유 없이 나온 글이나 말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 넘게 살고 난 뒤에야 나이 먹는다고 절로 철들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으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게 된다. 걸러야 할 말을 제대로 거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질문하는 게 아닐까 싶다. 먼저 나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쓰는 언어가 비하나 차별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그다음은 말 같지 않은 말을 내게 내뱉은 타인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비수 같은 말에 상처받고 나가떨어지지 않으려면 무례한 타인에게 질문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느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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