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내 몸과 화해하는 시간
―사랑은 나 자신부터
나는 참 나쁜 주인이었다. 내 몸은 주인을 잘못 만나 꽤 긴 시간 이 병원, 저 병원, 이 진료과, 저 진료과를 순례하듯 돌았다. 몸이 내게 보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을 거는 순간을 무심히 지나친 대가는 컸다. 젊은 날에도 나는 몸에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조심성이 많아 넘어지거나 다치는 일은 적었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는 데는 둔했다. 뭐든 머리로 이해하고 머리로 상황을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서 몸이 원하는 걸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머리와 몸의 불화로 인한 문제는 그 불화의 시간만큼 복잡다단했다.
업무 특성상 오전 시간에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직장에 다닐 때였다. 바쁜 시간 동안은 물을 마시는 것도, 눈에 인공눈물을 넣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참았다. 참는 게 오랜 습관이 되니 나중엔 목이 마른 것도, 일에 집중하느라 눈을 깜빡이지 않아 눈이 시린 것도, 방광이 보내는 신호도 감지하지 못하게 됐다. 숨 쉬는 것조차 ‘빨리빨리’에 쫓겨 호흡은 턱없이 짧아졌다. 막판 스퍼트 시간엔 짧은 숨조차 쉬지 않고 집중했다. 마치 원시시대 맹수 앞에서 도망치는 데 필요한 두 다리에만 온몸의 에너지를 집중시키듯, 나는 바쁜 업무 시간엔 마치 일하는 머리만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을 훌쩍 넘었다.
10여 년 전 맨 처음 신호를 보낸 건 눈이었다. 심각한 안구건조증을 알리려 각막궤양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각막궤양의 원인이 바쁘다는 이유로 눈 깜빡임을 제때 하지 않은 대가라는 걸 알게 된 건 겨우 2년 전이었다. 그 간단한 병의 원인을 아는 데 거의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업무 누수를 막으려 눈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끼며 일한 대가는 심각한 안구건조증과 마이봄샘 기능 저하였다. 남은 평생 주기적으로 레이저 치료를 받고 매일 눈 마사지를 해야만 책 읽고 글 쓰는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 눈이 주인을 잘못 만나도 한참 잘못 만났다.
바쁜 회사 생활을 할 때 난 손이 빠른 사람으로 통했다. 집에서의 나는 급할 게 하나도 없는, 느리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집에서 충분히 내 천성대로 지냈기에 회사에선 실제의 나와 다른 날쌘돌이로 변신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창 바쁜 오전 시간, 내 몸의 모든 시스템은 일을 제시간에 완수하기 위한 모드로 자동 전환됐다. 20년을 한 직장에서 그렇게 살았다. 6개월 휴직에 이어 바로 퇴직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이 글을 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예전처럼 몸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간을 이어갔다면 결국엔 집이 아니라 병원에 드러누웠을 뻔했다.
눈이 브레이크를 걸어준 덕에 더 큰 화를 면했다. 몸 가운데로 말린 어깨는 휴직 직후부터 8개월째 해온 요가로 어느 정도는 펴졌다. 지난주 다녀온 또 다른 진료과에선 더 이상 방광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루 3~5시간 간격으로 5번 정도 화장실 가는 게 이젠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렇게 되기까지 10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목마름을 잘 느끼지 못할 지경에 이른 나의 하루 수분 섭취량은 성인 평균치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수분 섭취량이 줄면서 소변량도 적은 게 문제를 일으킨 거였다.
한 지인은 지방 거래처로 직접 운전해 다니는 업무 특성상 제때 화장실에 가지 못해 심각한 변비로 고생 중이다. 이처럼 몸이 보내는 신호를 한 번, 두 번 무시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신호를 보내도 머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그게 계속되면 결국엔 큰 병과 맞닥뜨리는 순간을 맞는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째깍째깍 알아차리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성인이 돼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보다 상사의 말 한마디, 그의 심기에 더 집중하고 수많은 세상사에 노출되면서 점점 자신의 몸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몸의 감각에 둔해지는 건 그에 따른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배고픔이 식사를 챙겨 먹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고 가까운 가족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회사 일로 파김치가 됐다면 쉬어야 하는데 친구를 만났다가 사소한 의견 차이를 대화로 풀지 못하고 싸우거나 혼자 연락을 끊는 식으로 우정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몸의 문제가 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몸이 음식을 원하는지, 휴식을 원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우리는 자기 몸의 신호를 읽는 데 무지하다.
그동안 나는 몸을 마음이나 정신의 하위 개념으로 잘못 알고 살았다. 몸이 내 마음을,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몸과 마음이 함께 가야 멀리 오래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요가를 하고 갖가지 영양제를 챙겨 먹으면 몸을 잘 돌보는 것인 줄 알았다. 내 건강을 잃어가며 추구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돈, 지위, 명예, …. 과연 건강을 잃은 뒤에도 그것들이 여전히 내게 소중할까.
인생이란 긴 레이스 중반에 들어선 어느 날, 뭔가에 걸려 넘어져 나뒹굴었더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이 보였다. 나를 넘어지게 한 것은 내가 만든 어리석음이었다. 인생은 속도전이 아닌데 숨까지 참아가며 달려서 내가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전의 나를 돌아본다. 한때의 동안은 어딜 가고 세파에 부대낀 얼굴이 보인다. 세상 사람 아무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더라도 나까지 나를 몰아세우진 말자고 다짐한다. 괜찮아, Jasmine. 이젠 좀 천천히 가도 괜찮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어 봐. 그렇게 머리가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이 가을, 내 몸과 화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눈도 자주 깜빡이고 어깨도 펴본다. 앞만 향하던 눈길을 길가에 나뒹구는 낙엽에도 보내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목을 꺾고 쳐다본다. 모든 게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던 듯하다. 괜찮아! 쉬엄쉬엄 가도 괜찮다고 내게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