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짝지 미숙에게
―네가 어느새 명퇴를 한다니
친구
홍 수 희
오랜 침묵을 건너고도
항상 그 자리에 있네
친구라는 이름 앞엔
도무지 세월이 흐르지 않아
세월이 부끄러워
제 얼굴을 붉히고 숨어 버리지
나이를 먹고도
제 나이 먹은 줄을 모른다네
항상 조잘댈 준비가 되어 있지
체면도 위선도 필요가 없어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웃을 수 있지
애정이 있으되 묶어 놓을 이유가 없네
사랑하되 질투할 이유도 없네
다만 바라거니
어디에서건 너의 삶에 충실하기를
마음 허전할 때에
벗이 있음을 기억하기를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선물을 주셨네
우정의 나뭇가지에 깃든
날갯짓 아름다운 새를 주셨네 <시 전문>
“여고 1학년 때 짝지 미숙아, 이 시를 읽는데 네 얼굴이 떠올랐어. 벙싯벙싯 잘 웃는 소녀였던 넌 지금도 그래. 그런데 울컥하는 이 마음은 뭘까.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전화 한번 해야지 벼르던 어느 주말, 인왕산 다녀오는 길에 네 전화를 받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평촌에 정착한 미숙은 결혼하면서 경기도로 왔고, 난 한참 뒤 직장 때문에 서울로 왔다.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코로나로 약속이 두어 번 미뤄지면서 가장 최근에 만난 게 벌써 2년여 전이었다.
미숙은 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둘째가 유치원 다닐 무렵 교편을 잡으면서, 나는 회사 다니며 부모님 댁 오가느라 서로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속엔 열여섯, 열일곱 살 때의 모습과 느낌 그대로의 친구였다. 부산 사는 여고 동창들과는 1, 2년에 한 번씩 해운대로 휴가를 가 1, 2박씩 함께하기도 했는데 정작 가까이 있는 미숙과는 1년에 한 번 밥 먹기도 어려웠다.
전화 통화에서 미숙은 1월에 명예퇴직을 한다고 했다. 천직이란 게 있다면 미숙에겐 교사가 그랬다. 그런데 명퇴를 한다니…. 참신한 수업 자료를 구하러 방학 때마다 일본을 드나드는 열정을 보였던 친구라 더 그랬다. 아들은 일찍 결혼시켰고, 딸도 직장생활 5년 차가 돼 경제적으로는 걱정이 안 됐지만, 이유가 궁금했다. 게다가 미숙이 분양받은 아파트에 입주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가 보지 못한 상태여서 돌아오는 주말에 가기로 했다.
주말 아침, 평촌의 한 지하철역과 연결된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선물을 사는데 뒤에서 미숙이 불쑥 나타났다. 차로 마중 나온 미숙이 시간이 돼도 내가 나오지 않자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식품 코너로 왔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차를 타고 미숙네로 가면서 왜 명퇴를 하려는지 물었더니 1년 전 남편이 퇴직해 혼자 지내는 게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둘 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동안은 방학 때마다 부산의 시댁, 친정 어른 챙기고, 학교 일 하느라 정작 부부만의 여행은 자주 하지 못했다고 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부부만의 여행도 다니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미숙 부부는 화합의 내공이 대단하다. 그들을 보면서 배우는 게 참 많다. 사소한 듯하지만, 배우자를 존중하는 일상의 행동들은 내게 많은 걸 돌아보게 한다. 미숙이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난 미숙의 제자와 동료 교사들이 만들어준 명퇴 축하 영상을 봤다. 오래전 졸업해 외국에 정착한 제자와 직장인이 된 제자들의 깜짝 인사에 이어 재학 중인 학생들의 아쉬움 가득한 감사 인사가 나오고, 각종 학교 행사에서 찍은 미숙의 사진들을 배경음악과 함께 편집한 것이었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만든 그 정성도 놀라웠지만, 그 내용이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영상을 보고 난 뒤 비록 정년을 채우진 못했지만, 그동안 정말 수고했다고 미숙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 미숙이 차려낸 점심상 앞에서 우린 맘껏 수다를 떨었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줬던 미숙 남편은 내가 일어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에야 운동을 마치고 돌아왔다. 셋이 한 달 제주살이 등 여행 이야기를 하다 내 남편도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안 미숙 부부는 두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을 제안했다. 머지않아 마스크를 벗게 되면 가까운 일본 여행을 시작으로 넷이 함께하는 여행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하철역에서 미숙과 헤어져 돌아오는데 이토록 좋은 친구가 무탈하게 내 곁에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미숙아, 우리가 짝지로 만난 지 어느새 40년이 넘었어. 쏜살같이 50대 후반을 향해 달리는 ‘나이’도 우리 우정 앞에서는 맥을 못 추지. 그동안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열심히 살아온 지난 세월 덕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겠지. 나도 일을 내려놓았고, 너도 천직을 내려놓았으니 이젠 자주 서로 목젖 보여주는 웃음 나누며 살자. 네가 힘들 때 크게 힘이 돼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환한 얼굴로 맞아줘서 고마워. 우리 곱게 물들어 가자. 나는 네게, 너는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