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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un 24. 2023

65. 어느 교실의 아무 말 대 잔치

―귀 닫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들

다양한 수업을 듣다 보니 나와 다른 연령대,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최근 한 수업에서 가슴 서늘한 상황을 경험했다. 새로운 강의를 들을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로 향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마침 강의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첫 줄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강의실과 가까워질수록 수강생이라기엔 너무 나이 들고 심신이 불편한 듯한 80대 초중반의 할아버지가 분명해 보였다. 내 시야에 보이는 단 한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이대로 발길을 돌려야 하나 고민하다 용기를 내 강의실로 들어섰더니 왼편에 강사님이 앉아 있고 교실 안쪽 뒷줄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강사님 바로 앞인 왼쪽 라인 첫 줄에 자리를 잡았다. 강사님은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긴 머리에 이 있는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실내에서, 더구나 강의실에서 쓰기엔 좀 과한 모자였다. 출석자가 적어 강의 시작이 몇 분 늦춰졌는데 수강자의 절반이 왔을 때쯤 강의가 시작됐다. 강의 시작 후에도 절반의 수강생이 한 명씩 몇 분 간격을 두고 들어왔다. 강사님이 등진 칠판 옆에 출입문이 있다 보니 뜻하지 않게 늦게 들어오는 수강자들의 면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참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제각각의 복장과 표정으로 들어오는데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른쪽 라인 첫 줄에 앉은 80대 어르신의 휴대전화는 몇 분 간격으로 알람이 울려대고, 늦게 들어와 수업의 흐름을 끊으면서도 미안한 기색 없이 당당하고 여유로운 사람들 덕에 하루 마무리를 몇 시간 남기지 않은 저녁 수업이 급 피곤하게 느껴졌다. 강사님도 순간 평정을 잃은 표정이었다.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하면 안 되겠느냐는 강사님에게 어르신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노숙인 차림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르신의 휴대전화는 다행히 직원이 와서 무음 처리를 해 겨우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은 일방적 강의 형식이 아니라 강사님이 던진 주제에 맞게 수강자들이 한 명씩 나와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동사나 형용사를 말하고 그 단어를 선택하게 된 배경을 3분 안에 설명하는 미션이었다. 맨 처음 호기롭게 나선 사람은 40대 남성이었다. 웃는 모습이며 체격 등이 신화의 김동완과 너무 닮아 형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외모였다. 그런데 그는 강사님의 주문과는 달리 웃는 얼굴로 안드로메다를 오갔다. 마치 말이 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 이때다, 하고 아무 말 대 잔치를 벌이는 광경 그 자체였다.      


5분쯤 지났을 때 강사님이 주제에 대해 환기를 했지만 그는 주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아니면 귀를 닫기라도 한 듯 또다시 샛길로 빠졌다. 결국 강사님이 유도 질문으로 주제에 약간, 아주 약간 근접한 대답을 겨우 받아냈고 시간은 10분 넘게 지나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사람도 강사님의 주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 매일반이었다. 주제에 맞게 주어진 시간에 맞춰 대답한 수강자 비율은 30% 정도였다. 자기 직업을 밝히며 자랑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는 40대 여성, 뜬금없이 결혼이 너무 아파서 이혼했다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개인사를 공개하며 자신이 하는 일을 밝힌 60대 여성 등 누구 하나 범상치 않았다.

    

수업은 강사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수강자들의 횡설수설에 가까운 이야기들로 교실이 가득 찬 상태로 2시간을 넘기고야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만큼이나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무엇이 사람들의 귀를 막았을까? 3년이 넘는 코로나 기간의 소통 단절 영향일까. 외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집 안에서 복작대다 보니 가족 간 불화는 깊어지고 그만큼 속에 쌓인 울화가 많아서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의실 안에서의 불통이 강의실 안에서만 그칠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은 결국 나와 생활반경이 어느 정도는 겹치는 이웃일 텐데 남의 말, 심지어 자신의 의지로 신청한 수업의 강사 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어쩌면 자기 안의 울화로 남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안쓰럽고 한편으론 답답했다.

     

모두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과 다른 세대, 다른 성(性)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는 그들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두렵기조차 했다. 거기에 나는 과연 그들에게 따뜻한 이웃인 적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까지 더해져 여름밤의 공기가 숨 막힐 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다양한 수업을 들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수업에서는 결이 맞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친구가 되고 몇 년씩 소통을 이어오곤 했다. 여름날 저녁 수업의 서늘한 경험이 제발 그 몹쓸 코로나 때문이면 좋겠다. 이제 코로나가 힘을 잃은 만큼 예전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에너지가 오간다면, 그래서 자기 말만 무턱대고 쏟아내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잘 듣고 제때 공감하며 정을 나누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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