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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ul 02. 2023

66. 단발머리

―그리운 시절 여행

여중 시절이던 1970년대, 그땐 거의 모든 여중‧고생의 머리 형태는 단발머리였다. 그것도 귀밑 1cm, 늦어도 4주에 한 번씩은 잘라야 아침 등교 때 교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여중 입학을 앞두고 처음 엄마와 함께 미용실에 가서 긴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앞모습도 어색한데 뒷머리조차 목덜미 아래까지 나 있어 면도도 해야 했다. 요즘처럼 전동커트기가 없던 때라 1인 미용실 원장님이 면도칼로 쓱쓱 미는데 살짝 베이기까지 했다. 포스는 전문가였으나 솜씨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충분히 나이 먹은 지금 같았으면 강하게 어필했겠지만, 그때만 해도 극내향성의 아이였기에 여린 목덜미가 따끔거리는데도 말없이 미용실을 나섰다. 집에 다 와서야 엄마에게 이르듯 말했지만, 그땐 목덜미 통증보다는 옆으로 깡총하게 올라붙은 머리가 어색하고 싫어서 계속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곤 했다.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이 어색하지 한 달쯤 지나자 적응이 됐다. 그런데 목덜미에 피를 낸 그 미용실에 다시 가긴 싫었다. 요즘에야 동네에 미용실이 널렸지만, 그때만 해도 미용실이 흔치 않았다. 내 투정을 들은 아버지가 직접 잘라주겠다고 하셨다. 아버진 손이 보배인 엔지니어였다. 수도면 수도, 전기면 전기, 뭐든 아버지 손만 닿으면 제 기능을 회복했다. 엄마가 어깨에 두를 보자기를 찾아오고 아버지가 의자를 거실 한가운데 놓으면서 즉석 미용실이 차려졌다. 아버진 잘 벼린 가위를 들고 의자 옆에 서고, 난 손거울을 든 채로 의자에 앉았다. 그게 가내 미용실이 차려진 첫날 풍경이었다. 가내 미용실은 내가 대학을 가서도 한동안 단발머리를 유지하면서 8년 가까이 이어졌다.     


대학생이 되고 한참 동안 파마할 엄두를 내지 못한 데는 목덜미를 벤 아픈 기억 말고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대학 입학 후 시문학동아리 모임에서 단발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선배들과 동기들의 멘트(어쩌면 솜털 보송한 신입생을 붙잡아두기 위한 사탕발림) 때문인지 단발머리는 오랫동안 나를 정의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 됐다. 식영(식품영양학)과 단발머리. 그때 내게 시집(지금은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게 참 웃프다)을 건네고 나를 마치 순수의 표상인 양 단발머리로 칭하며 시를 써서 보낸 동기 남학생의 영향도 컸다. 그런데도 파마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어딜 가든 여고생 취급을 받는 게 싫어서였다. 지금이라면 서너 살만 어리게 봐줘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지만, 열아홉, 스물이던 그땐 소녀가 아니라 여인이 되고 싶었다.      


몇 날 며칠 엄마를 붙잡고 파마를 할까 말까 묻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하기로 했다. 하지만 뭐든 경험이 중요한데 미용실 출입을 안 한 터라 어떤 헤어스타일이 내게 어울리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번엔 친구 여러 명에게 묻고 물어 파마 잘한다는 학교 앞 미용실을 찾았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냐는 원장님 말에 어려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원장님은 단발머리라 선택지가 별로 없다며 알아서 해주겠다고 했다. 코를 찌르는 파마약 냄새를 참아가며 머리를 말고 비닐 커버를 덮어쓴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나는 곧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신할 거라는 믿음으로 긴 시간을 견디고 견뎠다.     

 

드디어 비닐 커버를 벗을 시간이 됐다. 촉촉하고 뽀글뽀글해진 머리가 밝은 전등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망했다ㅠㅠ. 샴푸 전이긴 했지만 감고 손질을 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난 소녀가 아니라 여인이 될 사람이니까. 드디어 샴푸를 마치고 의자에 앉자 요란한 드라이어 소리와 함께 꼬불꼬불한 머리가 조금씩 자연스럽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울 속엔 소녀도, 여인도 아닌 못난이 양배추 인형이 앉아 있었다. ‘내 단발머리를 돌려줘~~.’ 내 안의 아우성을 듣지 못한 원장님은 컬이 잘 나왔다며 혼자 흡족해했다. 서비스받는 사람은 울고 싶은데 서비스하는 사람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어이없는 상황.     


결국 나는 1년이 넘는 긴 인내의 시간을 거쳐 양배추 인형에서 옆머리는 여전히 좀 짧았지만 단발머리 비슷한 모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맞은 3학년, 산업시찰 명목으로 우리 과 40여 명이 전세 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2박 3일 여행을 갔을 때였다. 정식 휴게소가 아닌 도로에서 잠시 쉬어갈 때였다. 뒤쪽에 앉았던 탓에 동기들이 다 내리고 거의 마지막에 버스에 폴짝 뛰어내리는데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던 기사님의 한마디. “아이고, 언니 따라왔나?” 마치 귀여운 딸내미를 보는 듯 아빠 미소를 지으며 진한 경상도 억양으로 묻는 기사님에게 당황한 나는 그대로 버스 밑으로라도 기어들어 가고 싶었다. 졸업반이 된 후 더는 그런 아이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과감하게 커트를 했다. 단발머리에서 파마해 봤자 양배추 인형을 피할 재간이 없었으니까 커트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 졸업 앨범 속의 나는 지금과 같은 커트머리로 노숙미를 뽐내고 있다.     

 

젊은 날, 아니 어린 날 꽤 오랫동안 나를 가장 나답게 정의하는 단어로 선배, 친구들에게 불리던 단발머리.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듯이, 단발머리로 돌아갈 수 없는 50대 후반. 그때 사진을 많이 찍어두지 못해서인지 단발머리는 여전히 아련하고 그리운 나의 옛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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