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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Nov 04. 2023

75. 코로나가 불러온 시

―봄엔 독감이, 가을엔 코로나가

코로나가 왔다. 작년 봄에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던 코로나가 올가을을 맞아 다시 나를 찾아왔다. 지난 6월 밤새 목을 조이는 듯한 독감 증상으로 몇 날 며칠 밤을 제대로 눕지도 자지도 못하고 지새운 지 만 4개월 만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나의 아저씨’ 관련 기사와 어이없는 가스라이팅 기사가 앞다퉈 업데이트되는 가을밤을 통증으로 꼬박 새우고 받아 든 분홍색 두 줄 키트. 남의 사정과 내 사정이 뒤엉켜 삶이 참 버라이어티하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었다.      


지난번 코로나 때도 확진 전날 후배와 저녁 식사를 했다. 다행히 후배는 코로나를 비켜 갔다. 이번엔 시 공부 친구와 확진 전날 브런치를 했다. 목이 칼칼한 것 외엔 증상이 없다고 했지만 끝까지 무사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난 8월 코로나 감염병 등급이 2급에서 4급으로 하향 조정돼 격리기간도 5일로 줄었다. 그래도 밤새 겪은 고통은 1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누웠는데 지난 2월 시 수업 때 처음 접했던 시가 떠올랐다. 전동균 시인의 ‘배가 왔다’는 시였다. 시인은 11월 저녁의 어스름 속에 자기 앞에 툭 떨어진 낙엽 한 장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배가 왔다

                                       전 동 균     


비 그친 11월 저녁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

어스름 고요 속으로

배가 왔다     


수많은 길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내 속의 빈 들판과

그 들판 끝에 홀로 서 있는 등 굽은 큰 나무와

낡은 신발을 끌며 떠오르는 별빛의

傳言을 싣고     


배는,

이 세상에 처음 온 듯이

소리도 없이 지금 막 내 앞에 닿은 배는,

무엇 하러

무엇 하러 나에게 왔을까     


불타는 녹음과 단풍의 시간을 지나

짧은 생의 사랑이란, 운명이란

발목 시린 서러움이란

끝내 부르지 못할 노래라는 것을 알려주러 왔을까    

 

울음 그친 아이와 같이,

울음 그친 아이의 맑은 눈동자같이,

솔기 없는 영혼을 찾아

어디로, 이 세상 너머 어느 곳으로

무거운 내 육신을 싣고 떠나려 왔을까     


배가 왔다

비 그친 11월 저녁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

어스름 고요 속으로

내 손바닥만한 갈색 나뭇잎 한 장이.            <시 전문>     


비 그친 11월 저녁 빗물 고인 곳에 툭 떨어진 갈색 나뭇잎 한 장을 전동균 시인은 배가 왔다고 표현했다. 낙엽 한 장에서 이토록 깊게 자기 안의 사유를 풀어간 시인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시를 처음 읽었을 땐 시인의 연배가 나보다는 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알고 보니 20년 전쯤 시인의 나이 40대 초반에 쓴 시였다.


한창의 나이에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11월 저녁, 시인은 낙엽이 자기에게 무엇을 전하러 왔는지 묻는다. ‘짧은 생의 사랑이란, 운명이란, 서러움이란 끝내 부르지 못할 노래라는 것을 알려주러 왔을까’ 재차 묻는다.  시인은 무거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있지만, 갈색 나뭇잎 배를 타고 ‘울음 그친 아이의 맑은 눈동자같이, 솔기 없는 영혼을 찾아 이 세상 너머 어느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시인은 시를 쓰던 그때 이미 그 배를 타고 나아가지 않고도 스스로 솔기 없는 영혼을 찾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내가 20년 전에 이 시를 읽었다면 아마 다 읽기도 전에 시집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젊은 날의 방자함은 자기가 딛고 선 땅에 깊게 뿌리내리려 하기보다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마련이니까. 40대 초반의 시인은 나뭇잎 한 장이 자기 앞에 떨어진 연유를 깊이 파고든다. 이 세상에 온 자로서 언젠가는 자기를 저 세계로 태워 갈 배가 올 것을 가슴으로 알아채는 시인의 깊고 맑은 눈이 그저 놀랍다.  

    

20년의 시간을 훌쩍 건너 이 시가 깊어가는 가을 저녁 어스름의 배처럼 내게로 시나브로 왔다. 지금 내게 알려줄 게 있는 것처럼. 내게도 ‘불타는 녹음과 단풍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의 ‘발목 시린 서러움’ 또한 이 세상에 왔기에 기꺼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들의 결과가 아닌 그 과정이 삶의 무늬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현재 내 삶의 무늬는 어쩌면 ‘불타는 녹음과 단풍’보다 훨씬 더 격동적이고 다채로울 것 같다. 한 움큼 약을 먹고 이 시를 읽고 글을 쓰는 지금이 내겐 ‘별빛의 傳言을’ 읽는 순간으로 여겨질 만큼 설렌다. 이런 설렘을 느끼며 이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코로나를 앓느라 일주일 넘게 집에 갇힌 덕분이다. 그래도 이제 코로나는 그만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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