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우리 집 앞마당은 온통 꽃으로 가득했습니다.
봉숭아, 채송화, 해바라기, 개나리, 연산홍, 살구꽃, 그리고 목련까지... 꽃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계절마다 순서대로 피어나고 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찬란한 순환을 매일 지켜보며 자란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나도 엄마를 닮아갑니다.
영국에서도 나는 엄마처럼 꽃을 가꾸고 가든을 다듬었습니다.
가든 곳곳에 빈틈없이 알뿌리를 심고 나목을 가꾸며, 엄마가 보여주었던 그 평온한 행복을 되찾으려 애쓰곤 했습니다.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매화였습니다.
내 고향은 온통 매화 천지입니다. 어느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붉은 홍매가 손을 흔들고, 즐겨 찾던 산방에도 홍매와 청매, 백매가 활짝 피어 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매년 매화를 시작으로 온갖 꽃구경을 다녔던 시절이 엊그제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하십니다. 안방에 앉아 계신 어머니의 시간은 그 시절의 꽃밭보다 훨씬 더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몇일 전, 언니와 짧은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오며 매화 한 줄기를 꺾어왔습니다.
화병에 담아 조심스레 어머니의 코끝에 내밀었습니다. 고작 꽃 두 송이가 피었을 뿐인데, 방 안에는 대단한 향기가 감돌았습니다.
그윽한 향기를 깊게 들이마신 어머니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로 화답하셨습니다.
“세상에... 꽃 두 송이에서 이런 향기가 난다니...”
그 순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행복한 미소가 방금 꺾어온 매화꽃처럼 곱게 피어나는 것을요. 비록 어머니는 더 이상 꽃길을 걷지 못하시지만, 그 작은 꽃가지 하나에 담긴 봄을 온 마음으로 누리고 계셨습니다.
그 미소를 대하니 문득, 이맘때면 온 집안에 가득했던 달큰한 쑥버무레기와 알싸한 생강 향 밴 시원한 식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합니다.
늙어가는 딸의 입에 포슬포슬한 쑥떡을 넣어주시던 어머니의 그 따스한 손길이, 지금 내 손에 잡힌 어머니의 여윈 손등 위로 겹쳐옵니다.
꽃은 지고 계절은 바뀌어도, 어머니의 미소가 남긴 이 향기만큼은 나의 계절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든든한 대지가 되어, 당신의 남은 시간이 매화 향기처럼 그윽하고 식혜처럼 달콤하게만 흐르게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