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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Oct 28. 2023

싸가지와 천사 사이

영국 찐 시골살이

좌는 싸가지요. 우는 천사가 살고 있는 곳, 내 이웃 이야기다. 좌에게서 받은 이 불쾌한 감정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 녀석과 마주칠 때마다 퉤 하고 내뱉어 버리고 싶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오면, 내가 아직도 여물지 못한 옹졸한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 싶어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 겨우 우리 자식 또래이고, 그러니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라 그러겠거니 하다가도 한 번씩 경우 없고 무례한 행동을 할 때면,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애쓰던 좁쌀 같은 마음이 자꾸 무너져 내려 이젠 그놈을 투명인간쯤으로  취급하며 살고 있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뜰, 그들 집과 우리 집을 경계하고 있는 나무들의  전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전 내 삐죽삐죽한 나뭇가지를 손질하다 잠깐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옆집 놈이 제 와이프에게 투박한 웨일스 사투리로 말하는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헤이~ 옆집 chink 들어갔어? 나 저것들 맘에 안 들어..., 어쩌고, 저쩌고... "  

아니, 저놈이 "우리가 일 끝내고 집에 들어갔거니 하고 저런 험담을 하는 거야?"

"아무리 험담이래도 저따위 말을 한다고? 저건  아니지?"

이곳에 이사 와서 집수리에, 짐정리에, 여기저기 일 보러 다니느라 지들과는 아직 일면식도 없는데 저런 말을 해? 어이기 없었다. 생각 같아선 냅다 한마디 내 던질까 싶었지만 저런 생각에 저런 천박한 언어를 구사하는 놈이랑 말 섞여 뭐 해 싶었다. 하던 전정작업을 마무리하고 계단을 내려오다 그 집 주방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싸가지 놈과 대화하고 있던 그놈의 와이프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눈이 마주쳤지만,  순간 그녀는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실실거리던 눈빛을 금세 바꿔 남편을 쏘아봤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와 뒷문을 꽝! 닫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걸로 그들에게 우리의 감정을 전달했다.  잠시 후 싸가지 부부의 싸움 소리가 났고, 그들은 오후 내내 시끄럽게 싸웠다. 둘이서 뭔 소리를 하며 싸우는지 알 순 없었지만 어쨌든 방귀 뀐 놈의 목소리가 더 컸다.  그렇게  불쾌하고 걸쩍지근한 감정을 품은 채 우리는 그들의  택배를 두 번 정도 받아(딜리버리맨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전달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장 보러 나갔다 오후 느지막이 집에 들어와 장바구니를 정리하고 있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여니 그 싸가지 놈이 다짜고짜 지들 택배 받아 논거를 달랜다. 그놈만 보면 꼭지가 돌 지경인지라 다소 황당하고 기막혔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너네 택배 받지 않았어.'

'받았잖아, 너희들에맡겼다던데?'

'안 받았다고!!'

'저기 좀 찾아봐~ 저쪽에 있는지..., "

받지 않았다는데 집 오른편 창고를 가리키며 그곳을 찾아보라니, 뭐 이딴 놈이 다 있지 싶었다. 속으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몰라도 겉으론 고상한척하는 대부분의 영국인(윤여정 배우님이 정확하게 찍어서 말씀하신 대목)들정말 이렇 않은데, 이놈의 천방지축 불손함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차분함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하고 속사포처럼 큰소리치며 말했다.

"야~ 너 지금 이러는 거 아주 무례하다는 거 알아? 딜리버리맨이 저기에다 뒀다면 니들 집 그런 곳에 뒀겠지 왜 우리 집에다 둬! 우리 오늘 밖에 나갔다 방금 들어왔거든, 니들 택배 받지 않았고, 아니 우리가 집에 없었으니 받을 수 없었고, 앞으로 니들 택배 받아줄 일 없을 테니 내 집에서 당장 꺼져!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 얼씬 거리지도 마!"  

놈은 뒤도 안 돌아보고  대문을 나서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우리 집 오른쪽  "우  천사" 집으로 가서는 택배를 찾아 나왔다. 그때 그놈은 우리와 눈이 마주쳤지만 우리에겐 미안하다는 사과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는 그놈을 가정교육, 인성교육  제대로 못 받은 무례하고 인성 더러운 놈으로 치부해 버맀다.

그런데 이놈 보통 철면피가 아니다. 그러고 며칠 후 우리 집에 사다리를 빌리러 왔다. 그런 싹수없는 놈이다.


자, 그럼 '우 천사'님은 어떤 분일까? 키 크고 아름다운 금발의 삼십 대 후반 여성이다. 미소가 특히 아름답다. 그녀와 첫 만남은 그녀가 쓴 손 편지였다.  우린 그날 웨일스 수도 카디프에 볼일이 있어 아침 일찍 외출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도착해 보니 현관 우편함에 편지 한 통이 꽂혀 있었다. 편지는 '우 천사 K'가 보낸 거였다. 내용은 자기 집 앞가든과 우리 집 가든 사이의 중간 경계목이 심하게 훼손되어 그걸 언제부터 언제까지 수리할 예정이고, 수리는 요렇게 저렇게 할 예정인데 혹여 너희들이 이 공사 중 불편하거나, 이 도면중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내게 연락을 해주라는 등의  세부적인 공사 계획과 그녀가 직접 그린듯한 경계목 도면이 함께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오케이 신호를 줬고,  얼마 후 그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쪽지 한 장 남겼다. 코비드로 온 세상이 혼돈에 빠져들었던  그 시기, 우리 집에 엠블란스가 와서 사람을 태워 나가는걸 그녀가 본 모양이다. 병원에 다녀왔더니 현관문에 쪽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안녕, 난 옆집 K야. 누가 많이 아픈 거니?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도움을 줄 테니 언제든지 내게 연락해 줬음 고맙겠어.  

혹시 마켓에서 식료품 살 일 있거나, 자동차로 이동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부탁을 해.

여기 내 전화번호 줄게. 언제든 이 번호로 연락하면 돼..., "

간결한 내용이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처음 받은 따뜻한 메시지여서인지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온전히 전해졌고 감동이 한  밀려왔었다. 지금 그녀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그녀가 먼 출장을 가거나 집을 비우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그녀에게 배달된 우유를 우리 집 냉장고에 넣어뒀다 그녀가 돌아오는 날 돌려주고, 누가 집을 비우면 나름 서로의 집도 봐주고, 특히 우리가 장거리 여행을 할 때면 그 긴 시간 동안 그녀가 우리 집을 살펴주곤 한다. 서로의 생일파티나 바비큐 파티에 초대하기도 하고, 며칠이라도 서로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하는 그런 다정한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그녀는 천사가 분명하다.


우리 집 꽃님이들...

생각해 보니 우리 동네에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은 우리뿐이다. 처음 이곳에 이사와 사람들은 우리를 많이 낯설어했고,  한번 보고 또 보고, 두 번 보고 또 보고를 반복했다. 그래 많이 신기했겠지? 이 시골 산골짜기에 이방인에 젊은이도 아닌 중늙은이 동양인들이라니, 우리도 그네들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난 그런 어색함을 견딜 수 없어하는 인간인지라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든 마주치면 "하이~, 헬로~, 굿모닝~"을 입에 달고 살고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버스 운전사에게도 마트 케셔에게도, 쇼핑하며 스치는 낯선 이들과 눈이리도 마주치면 눈웃음으로, 앞뜰 가드닝 하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그러다 보니 차츰 이웃들이 내게 받은 미소를 다시 내게 돌려주기 시작했고, 조용히 말을 붙이기도 한다. 종종 너네 가든 장미 정말 예쁘다면서 엄지를 치켜세우며 지나가는 어르신도 있다. 읍내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이웃이 차를 멈춰 우리를 태워 읍내 마켓 앞에 내려주기도 하고,  엄지 척 어르신 가든에 꽃이 너무 예쁘다 했더니 언제든 가지를 끊어다 심으면 잘 자랄 테니 마음껏 끊어 가라고도 하신다.

그래, 이 나이에 아등바등 거리며 왜 살아? 이렇게 살면 되는 거지. 처음엔 낯설었지만 지금은 조금씩 이들에게 스며들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조용히 부드럽게, 좌도 이웃이고, 우도 내 이웃이지, 좌가 있기에 우 천사도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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