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50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희미해졌던 의식이 돌아오는 시간. 아직 알람이 울리기 10분이 남았지만 몸은 항상 소리보다 빠르게 깨어났다. 반복됨에 의한 기계적 학습인지, 기상시간에 대한 강박적 집착 때문인지, 그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수면 시간에 상관없이 잠은 이 시간을 기점으로 더 잘 수도, 덜 잘 수도 없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같은 패턴으로 화장실, 냉장고, 식탁 그리고 또 화장실. 약간의 순서 변경조차 없다. 어떠한 강제력도 없었지만 두 다리와 두 팔은 항상 규칙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의식이 있긴 한 것일까, 아침이면 자유의지는 항상 두 신체에 갇혔다. 아침뿐이면 다행이련만.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탑승구를 지나 전동차의 같은 칸 앞에 기다린다. 그나마 날마다 다른 옷을 입는다는 사실만이 어제와 오늘을 구분해줄 뿐이었다. 빨래가 필요 없는 세상이었다면 일주일은 평일과 주말로만 나뉘었을 것이다.
버스였으면 달랐을까. 지하철도 항상 같은 시간이다. 가끔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그들도 나를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이 암묵적 합의라도 된 듯, 경계선은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다. 가끔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이 죽은 자들처럼 보인다. 발 디딜 곳 없이 균형 잡기도 힘든 곳에서 고요 속에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쩌면 좀비 바이러스가 이미 모두에게 퍼져 있는 지도 모르겠다. 좀비는 본인이 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을까. 주변 모두가 좀비라면, 99명의 좀비와 1명의 인간이 있다면 이상한 존재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곤 좀비는 본인이 평범하다 생각할 것이다. 지금의 지하철도 그런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의식을 마저 끝내기 전에 항상 사람들은 타고 내리며 그럴 때마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을 노리듯, 두 눈은 자리가 비는 곳을 노린다. 피에 굶주린 좀비가 덤벼들 듯 빈자리에 덤벼든다.
기계인지 좀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간다. 초침 끝은 항상 앞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결국 원 위를 돌 뿐이다. 1부터 12까지의 숫자를 향해 달리지만 또 다른 1이 보일 뿐이다. 계속되는 반복 속에 처음의 목표는 희미해진다. 의미가 점차 기억나지 않는다. 무의미의 공허 속으로 빠져든다. 왜 달리기 시작했는가.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원운동을 그리며 달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었나. 어쩌면 진정 의미를 잃었을 때 기계와 좀비가 되는 것일까. 영혼이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지구와 달의 사이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둘은 충돌하거나 튕겨져 나간다. 지구와 달 둘 중 하나가 분명 무한한 원 운동의 지루함을 못 견디고 의미를 찾아 떠난 것이리라. 하지만 다행이도 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다. 찰나라고 표현하기에도 충분치 않다. 그 짧은 순간순간 마다 인간의 중력은 깨어지고 충돌하고 튕겨져 나간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두 다리는 열차에서 내려져 있다. 의식과는 상관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이런 것을 머슬 메모리라 하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래도 큰 상관은 없다. 중요한 건 단어의 뜻 같은 따위의 것이 아닐 테니. 이런 생각들을 하며 다시 지상의 출구 위로 올라선다. 스스로 굉장히 힙스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유는 아무나 못하는 것이겠지. 저 아무 생각 없는 좀비들을 보라. 나는 저들과 다르다. 인생에 대한 고민 없이 흘러 가는대로 살 뿐인 저 안타까운 중생들을 보라. 기계들을 보라. 마치 지금 나는 한 편의 고전소설을 써내려가고 있는 거대한 삶에 도달하려 하고 있지 않는가. 오로지 나의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만으로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외침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이 깨달음을 그들에게도 전해줘야만 한다!
바뀌어야만 한다. 시계태엽의 삶을 바꿔놓아야만 한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일 아침은 오렌지가 아닌 사과를 먹어야겠다. 규칙을 바꿔야 한다.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가능성의 크기를 점차 키워나가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보여줘야만 한다. 증명해내야 한다. 그들이 알 수 있게. 죽음만이 가득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줘야 할 거대한 사명이 내게 주어졌다. 거대한 유리문이 눈에 들어온다. 창에 비친 모습이 한층 멋져 보인다. 오늘 입은 옷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보다 정답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문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독성이 가득한 공기가 내 숨을 위협한다. 썩은 내가 진동한다. 모든 것이 짓눌러온다. 수많은 의지가 적이 되어 나의 깨달음을 방해하려 한다. 이건 폭력이다. 나의 다름을 인정하려하지 않는 억압이다. 푸코가 진실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에 굴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에 맞선다. 구분 짓기라는 폭력을 가하는 것은 저 자들이다. 나의 다름을 인정하라. 나의 특별함을 받아들여라. 너희의 지껄임은 피에 굶주린 좀비의 아우성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나의 자비와 깨달음으로 너희에게 지성을 주리라. 다시 좀비에서 인간이 될 수 있게 내가 도와주겠다. 왜 거부하느냐. 무지와 어리석음은 변화의 기회마저 두려워하는구나.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읽어라. 사유해라. 그 알을 깨고 나와야할지니.
내 의식의 물줄기는 거대한 파도와 같다. 그 높이와 거셈으로 모두 뒤덮어버리니 물결의 흐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결국 이에 압도될 것이다. 과잉이라 하지마라. 언제나 부족한 너희들의 의식은 약간의 수위만으로도 감당하지 못하기에 그런 것이다. 나의 그릇은 그 파도조차 모두 담아낼 수 있다. 너희의 눈이 지금 당장 코앞에만 머물 때 나는 그 뒤, 저 벽 너머 시야의 끝에 닿아있다. 나를 분노케 하지 말라. 아니 나의 그릇으로 나의 화를 잠재우리라. 나는 너희를 이해한다. 결국 이조차 나 또한 지나왔던 길이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아니 돌아와야 할 곳이 현실은 맞는 것일까. 지금 내 의식이 현실로 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저 먼 곳으로 오히려 떠나 버린 것일까. 왜 격랑의 파도 뒤에 남은 것은 공허함과 불안감, 답답함 뿐인 것일까. 왜 어제의 나와 그제의 나, 오늘의 나는 모두 같은 것일까. 현실은 왜 잠깐의 힙스터스러움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인가. 왜 초라함만이 머물고 있는가. 이 한 편의 예술병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이조차도 태엽 속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나. 잠시 가졌던 오만함에 대한 징벌이었던 것인가. 결국 사유의 끝은 또 다른 무의미란 결론을 얻을 뿐. 허무를 이겨낼 방법이 없다.
어쩌면 허무에 대항할 힘은 인간이 아닌 좀비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의미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무의미다. 의미를 생각하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무의미의 감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생각하기를 멈출 때, 괴로움은 사라지고 반복에 몸을 맡긴 움직임이 우리를 흘러가게 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항상 허사로 돌아가고 새로운 무의미 앞에 무릎 꿇고야 만다. 승리할 수 없는 싸움. 패배가 확정된 싸움을 마주해야 할 때의 태도에 대한 문제다. 죽음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존재다. 결국 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다. 공(空)과 죽음은 다르지 않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모든 일이 무의미해보이기 시작한다. 일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의 일로인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의미가 없기 때문인 것일까. 의미가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정해진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실존주의적 물음 앞에 나는 어떤 답을 내놔야할 것인가. 의미 없음의 의미라는, 질문조차 어처구니없어지는 부조리함을 어떻게 해결해 가야 하는가. 나의 느낌대로 가면 맞는 것인가. 이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만성적인 싫증인가. 좁다면 좁은 흰 벽 안에 여러 사람이 함께 갇혀있기에 느끼는 감정인 것인가. 우주적 섭리가 그렇게 된 것인가. 무의미와 감정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적 약속과 위신을 거부해도 괜찮은 것인가. 그렇다면 뛰쳐나가리라. 지금의 갑갑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그만두리라 선언할 것. 지금 내게 주어진 과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용기마저 주어지진 않는다. 나는 왜 순응할 수밖에 없는가.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가. 베리타스 보스 리베라빗. 왜 하지만 나는 자유로워지지 못하는가. 이것은 진리가 아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