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성인 여자 세 명과 10개월짜리 아기 한 명으로 복작복작한 우리 집 거실에는 3개 국어가 난무한다.
나는 내니(육아도우미)인 N과는 영어로, 헬퍼(가사도우미)인 딴딴과는 짧은 영어와 제스처를 섞어 소통한다.
N과 딴딴은 서로 미얀마어로 대화한다.
나는 럭키와 한국어로 놀아주고, N은 영어와 미얀마어를 섞어 럭키를 돌본다.
딴딴은 럭키 앞에서 미얀마어로 이야기한다.
나와 N은 원래 목소리가 큰 편이고, 딴딴은 내 앞에서는 조용조용하지만 N과 미얀마어로 이야기할 땐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서 소통이 동시에 이루어질 땐 -내가 럭키의 이유식을 먹이며 한국어로 어르고, 내 옆에 있던 N이 그것을 지켜보며 내게 영어로 이야기하다 지나가는 딴딴에게 미얀마어로 뭔가를 부탁하고, 딴딴은 N이 부탁한 것을 가져다주며 미얀마어로 럭키에게 말을 건넬 때- 한껏 소란스럽고 정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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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가능한 내니를 고용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부러워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에 노출되는 셈이니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더 영어가 능숙해지지 않겠냐는 논리다.
정말로 그럴지 아닐지는, 아직은 럭키가 너무 어려서 모르겠지만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몇 가지 복병이 있다.
첫 번째, 내니인 N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독학으로 배운 탓에 발음이 매우 개성있고 문법도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어를 잘하는 남편은 N이 하는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오히려 예전에 배운 영어를 거의 까먹은 내가 더 그녀와 소통이 잘 되는 편이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N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 구글 번역기를 자주 사용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가 무슨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게 되면서 소통이 조금씩 수월해졌다.
(예를 들면 N은 She와 He를 잘 구분안하고 사용하는데, 앞뒤 정황상 대화 속 인물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면 의사 전달이 된다. 또 항상 양파를 아이언이라고 발음해서 나도 양파 심부름을 시킬 땐 그냥 아이언이라고 한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덕분에 의사소통은 원활해졌지만 영어를 잘하는 다른 사람(예를 들어 남편…)이 나와 N의 대화를 들으면 문법도 발음도 엉터리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아기가 이런 엉망진창 영어에 노출되는 게 더 걱정일 때도 있다.
두 번째 변수는 노출 빈도수가 가장 많은 쪽이 영어나 한국어가 아닌 미얀마어라는 점이다.
나와 남편은 럭키에게 한국어를 쓰고 책도 한국어로 된 책을 읽어준다.
하지만 남편은 평일에는 출근 전과 퇴근 후에만 육아에 동참할 수 있다. 일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 비해 럭키 돌봄 시간이 부족하다.
나도 N이 출근하면 그녀가 점심이나 간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면 이유식이나 어른들 음식을 만들고, 미뤄뒀던 다른 집안일을 하거나 글을 쓴다. 평일 낮 시간은 나보다 N이 럭키를 돌보는 시간이 많다는 뜻이다.
브런치글도 N이 아기를 돌봐주는 시간에 쓸 수 있다
N은 아기를 돌볼 때 미얀마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한다. 처음에는 영어만 쓰려고 노력하며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아마도 아기에게 영어만 써야 좋아할거라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웃으며 미얀마에 사는데 미얀마어를 알아 들을 수 있으면 좋은 일이지, 라고 말한 뒤부터 봇물 터지듯 아이에게 미얀마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로 아기를 돌보는 것은 내니인 N이지만 하루에 4~5시간 이상 집에 머물며 청소를 하거나 N을 돕는 딴딴이 럭키와 상대하는 일은 다반사다. 그녀는 당연히 미얀마어로 아기와 놀아준다.
꼭 럭키에게 향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집의 평일 언어 지분은 미얀마어가 절대적으로 많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N과 딴딴의 수다 덕분이다. 럭키는 N에게 안긴 채 두 사람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N은 럭키가 미얀마어를 알아듣는다고 확신한다. 딴딴이 퇴근하면서 ‘집에 갈게’ 라는 말에 같이 가겠다며 몸을 바동거린다거나, N이 ‘밖에 나갈까’하면 문쪽을 쳐다보기도 한단다.
사실 아기가 미얀마어에 익숙하다는 걸 나도 종종 느낀다.
딴딴은 다른 방이나 주방을 청소하면서도 거실에 있는 럭키에게 ‘클레예(라고 들리는데 정확한 발음은 모르겠다. 아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라고 부르는데 그럴 때면 럭키는 고개를 딴딴이 있는 방쪽으로 돌리거나 몸을 들썩인다.
모방행동으로 ‘잼잼’과 ‘도리도리’를 연습시켰는데 럭키는 나의 ‘잼잼’에도, N의 미얀마 버전 ‘초촘마(N의 발음을 따라 적은 것뿐 이것 역시 정확한 단어를 모르겠다)’에도 주먹을 쥐었다 펴며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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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어에 대한 기대는 커녕 너무 다양한 언어 노출 때문에 오히려 말이 느려지는 건 아닐까 슬쩍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럭키는 7개월차에 한국에 갔을 때 이미 ‘엄마’를 정확히 불렀고 이후로 연습 후 ‘아빠’에도 성공했었지만 양곤에 돌아온 뒤에는 까먹었는지 열심히 다시 가르쳐도 말하지 못했다.
(다행히 요즘에는 배가 고플 때 ‘엄마’와 ‘맘마’를 함께 말하기 시작했지만 ‘아빠’는 아직도 다시 못하고 있다.)
럭키는 한국과 캐나다의 이중국적자이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어와 영어 모두 모국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포인 남편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도 정체성은 100퍼센트 한국인이기 때문에 일단 첫 번째 언어는 한국어여야 한다.
다만 현재도 한국이 아닌 타국에 살고 있고, 이곳에서 국제 학교도 다녀야 할 것이며, 나중에 성장하여 본인이 어느 나라에서 살기 원할지 모르기 때문에 영어가 중요한 건 사실이다.
또, 언어를 한 가지 더 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좋은 능력이고 현지에 살면서 현지인과 생활하며 스트레스 없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으니 할 수만 있다면 미얀마어도 익혀두는 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엄마의 욕심일 뿐.
우리 럭키가 3개 국어를 구사하는 아기가 될지, 아니면 난무하는 언어들 때문에 세 언어 모두 조금씩 느린 아기가 될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 섞인 양곤의 하루가 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