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쓸 것인가
혹시, 공포영화를 좋아하세요? 저는 공포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끔찍하거나 조마조마한 장면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서 가끔 떠오르기 때문에 공포영화를 일부러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로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름시즌엔 공포영화 두세 편 개봉을 합니다. 오싹한 공포가 더위를 이기게 한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겠죠? 공포영화를 분석해보면 몇 가지 공식이 있습니다.
공포영화의 초반부에는 보통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장면이 나옵니다. '아, 초반부터 뭐야'하는 생각으로 관객들은 긴장합니다. 관객을 압도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 장면은 주인공을 놀래키는 친구의 장난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 뿐입니까. 순조롭게 스토리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것도 진짜 공포는 아니고 보통 주인공의 꿈으로 끝납니다.
또 이런 장면도 공포영화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타는 자동차는 거의 망가져서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초조하고 안타까워서 관객들의 마음은 쪼그라듭니다. 살인마가 주인공을 덥칠 거리에 와서야 가까스로 시동이 걸립니다. 공포영화에서는 보통 주인공은 살아남지만 희생자는 꼭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희생되는지 그들의 캐릭터를 생각해 보신 적 있을까요? 보통은 일행 중 유독 호기심이 많거나 일행과는 다른 행동을 하거나 하지말라는 행동을 한 사람이 희생됩니다. 주인공이 가까스로 한 고비 위험을 넘기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쉴 때 (관객들도 함께 안도하고 있을 때) 주인공의 바로 옆이나 뒤에 살인마가 대기하고 있는 것도 공포영화 공식 중 하나입니다. 방심한 관객의 심리를 역으로 파고든 셈이죠.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장면과 장치에 익숙합니다. 익숙하고 잘 안다고해서 덜 공포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영화감독들은 이런 공식을 비틀어서 관객들이 공식의 변주를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궁리를 하기 때문이죠. 공포영화에 자주 사용되는 이런 이런 익숙함, 이런 공식을 ‘클리세’라고 합니다.
‘클리세’는 원래 프랑스의 인쇄업에서 인쇄에서 활자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진부한 줄거리나 장치, 연출 등에도 클리세라는 말을 붙입니다. 한국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출생의 비밀, 기억 상실, 회장님의 갑작스런 의식불명… 같은 것도 여기 포함됩니다. 클리세가 많은 드라마일수록 상투적인 줄거리가 되기 쉽고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기 어렵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은 영상작품만큼 획기적인 형식을 가질 순 없기 때문에 너무 익숙한 표현들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글쓰기에서도 ‘클리세’와 비슷한 게 있습니다. 누군가 처음 썼을 땐 독창적인 표현이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다보니 관습적으로 굳어진 표현들을 ‘사은유(死隱喩)’라고 부릅니다. 직역하자면 죽은 은유라는 뜻이죠. 은유는 글쓰기의 꽃이라고 할만큼 대단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사은유’는 경계해야만 합니다. ‘인생은 일장춘몽같다.’, ‘십자가를 지다.’ , ‘심금을 울리다.’, ‘머릿 속이 하얗게 되다.’ 이런 표현들이 대표적입니다.
은유는 내가 전하고자하는 걸 이해 쉽게 전달해야할 목적도 있지만 그 표현에는 참신함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쓴 문장을 나도 모르게 썼다면 퇴고할 때 수정해야 합니다. 나의 주제(메시지)가 아무리 신선하다고해도 진부한 표현 하나가 자칫 글전체를 진부하게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