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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글을 써야하는 이유(1)

무형의 가치 남기기

by 강진





2007년 12월3일, <월스트리트저널>에 스탠퍼드대학교 미스터리:흰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나이 든 이 남자는 누구일까? Stanford Mystery: Who’s the Old Guy In the White Nikes?’ 라는 제목이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2006년 봄부터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 있는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창의적 글쓰기’ 과정을 듣고 있던 나이키 창업자 필나이트에 대한 내용입니다. 검은 색 재킷을 걸치고 흰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나타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3학기 동안 글쓰기 과정을 듣던 그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필나이트는 500쪽이 넘는 자서전 <슈독 Shoe Dog>을 출간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78세되던 해였습니다.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 하늘의 새들과 태양보다 더 일찍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아침으로 커피 한 잔과 토스트 한 조각을 급히 먹어치운 뒤, 간편한 복장을 하고서 초록색 러닝화 끈을 동여맸다. 그런 다음, 뒷문으로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 남들보다 일찍 나와 앓는 소리를 하며 다리를 뻗고 기지개를 켜고는 차디찬 길바닥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왜 항상 시작은 이리도 힘든 걸까? <슈독> p.5



<슈독> 프롤로그 ‘동틀녘'의 도입부입니다. 오리건의 작고 조용한 도시 포틀랜드의 아침길을 달리면서 필나이트는 왜 자신이 태어난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었는지, 젊은 심장이 얼마나 고동치고 있었는지 적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읽은 글 중 명문을 몇 개 꼽으라면 저는 <슈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얘기할 것입니다.

프롤로그 ‘동틀녘’을 읽으면 1962년 새벽 한 젊은이가 스스로에게 선언했던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하더라도 신경 쓰기 말자. 멈추지 않고 계속 가자.’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동틀녘'이라 제목이 은유하듯 해가 떠오르기 직전, 태양이 떠오르면 찬란해질 세상을 기대하며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에 선 한 젊은이의 긴장과 기대감과 주체할 수 없는 희열같은 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에필로그인 ‘해질녘'에는 2007년 그가 아내와 함께 영화<버킷리스트>를 본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말기암 환자인 주인공 니콜슨과 프리먼이 그들은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남을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번쯤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적어보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보편적인 어휘가 된 계기가 된 셈입니다. <슈독>의 에필로그 ‘해질녁’에서 필나이트는 영화 속 장면이 자신의 삶과 닮아서 불편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을 만나 함께 걸으며 그들의 버킷리스트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도 질문을 합니다.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영화 <버킷리스트> 의 대사를 계속 떠올립니다. “당신에게 영향을 받고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당신의 삶을 말해준다.” 같은 대사에 기대어 자기 삶에서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소 긴 에필로그에서 오늘날 나이키가 있기까지 기억할만한 사람들을 소환해 냅니다. 나이키 경영과정의 반성도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황색 리갈 패드 위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글이 마무리 됩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황색 리갈 패드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거실로 가서 안락의자에 앉았다. 고요하고도 평온한 느낌이 몰려왔다. 창밖에 은은하게 빛나는 달을 흘끗 보았다. 옛날 선종 승려들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바로 그 달이었다. 영원히 맑게 빛나는 달빛 속에서, 나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슈독> p.547





70대의 필나이트는 무엇을 위해 젊은 학생들 틈에서 글쓰기를 공부했을까요? 컴퓨터 앞에 앉아 500쪽이 넘는 원고를 쓰기 위해 고독한 작업을 자초했을까요? 아마 그는 오늘의 나이키가 있기까지는 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고비를 극복했다는 그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이키의 경영자가 아니라 필 나이트라는 한 인간이 겪은 고난과 역경, 거기에 굴하지 않은 신념을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후세에 들려주고 싶은 경영철학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삶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테지요. 그런 무형의 유산이야말로 후세들에게 꼭 남겨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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