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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모 Jan 15. 2020

기록

2020년 1월 13일

기록


땅거미가 묽은 안개 퍼지듯 내려앉은 시각, 나는 얼어붙은 몸을 움직여 계단에 오른다. 일에 지쳐 무거워진 몸을 받드는 닥터마틴 플로라와 대리석이 부딪치며 내는 박수소리는 또각또각 복도에 새겨 진다. 복도 끝에 도달하면 반전세로 산지 3년째 되는 나의 집이 있다. 언제쯤 내 이름을 박은 명패를 건 집이 생길까.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청년의 꿈일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작은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이 주전, 공주에 있는 독립서점 ‘블루프린트북’에서 시작한 ‘월간 청사진’을 예약했다. ‘블루프린트북’은 미학의 일가견이 있는 목사장이 ‘마을 호텔’ 활동가들과 공주 제민천 냇가에 차린 독립서점이다. 지난 가을에 들린 ‘블루프린트북’은 청사진이란 뜻을 담은 서점답게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몽환적인 곳이었다. 아직 색도 바라지 않은 나무 계단을 밟고 다락에 올라 낙타울로 직조한 인도 카페트 위에 놓인 푸른 빈백에 반쯤 누워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점은 블라인트에 부딪혀 부셔진 볕뉘가 책에 붙어 장관을 이뤘고. 그 수많은 볕뉘와 그를 받치고 있는 책들은 자연의 기록과 인간의 기록이 뒤섞어 역사를 담아냈다. 블루프린트북은 그런 서점이다. 목사장이 자신의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와 태초의 자연을 기록으로 모아둔 서점.


목사장의 독립서점 'BLUEPRINTBOOK"


BLUEPRINTBOOK이라는 로고가 박힌 택배 박스를 품에 안고 집에 들어왔다. 커터칼로 옷에 붙은 택(Tag)을 뜯듯 살포시 가르니, 메리 올리버의 에세이 <긴호흡>이 담겨 있다. 책 표지에 인쇄된 사진에는 앙상한 나무와 작은 반달이 보인다. 책의 목차를 보니, ‘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이라는 소제목이 눈에 띈다. 그 챕터의 첫 문장이 이렇다.


“나는 30년 넘게 거의 늘 뒷주머니에 공책을 넣고 다닌다. 항상 가로 3인치(약 7.5센티미터, 세로 5인치(약 12.5센티미터)의 작은 크기에 손으로 꿰매어 만든 같은 종류의 공책이다.”


책에서 인도에서 맡던 향이 풍겨 왔다. 향에 담긴 기록이 펼쳐진다. 재작년에 여행했던 바라나시의 화장터, 마나카르니카 가트를 떠올리게 한다. 시체가 태우는 불의 뜨거움, 유가족들이 흘리는 눈물의 슬픔, 죽은 사람이 풍기는 아쉬움, 하루에 수십 명씩 바라나시 강으로 떠나보낸 화장터지기의 고됨, 마더 강가라고 불리는 바라나시 강의 일렁임, 그 모든 기억이 다시금 나를 화장터 앞으로 데려간다.


BLUEPRINTBOOK의 오픈을 기념하는 1월의 키워드 ‘기록’을 품은 월간 청사진 창간호, 그와 더불어 작년 이맘때 부고의 소식을 알린 메리 올리버의 <긴호흡> 그리고 모든 기록이 사라지는 도시 – 바라나시의 향기, 모두 기록의 일부다. 서점의 기록, 작가의 기록, 나의 기록.


인간은 기록으로 남고 싶은, 그리고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 세상에 숨을 처음 내뱉은 순간,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바늘구멍을 기어들어가 취업한 순간, 자신의 꿈을 이룬 순간, 사랑하는 연인과 입 맞춘 순간, 마지막 숨을 담아낸 순간, 이 모든 순간을 어떤 형태로도 남기고 싶은 것이 우리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 욕망 깊은 곳에는 다시는 이 순간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 있다. 자신이 한순간에 잊혀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하이데거의 철학을 빌리면 생명(존재자)들에게서 고유한 것이 빠져나가고 있고 모든 관계가 공허한 무로 변할 것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다. 언어, 예술, 이미지, 영상 이 모든 것은 그런 욕망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버리지 못한다. 사연이 담긴 편지부터, 제자들과의 추억이 담긴 롤링페이퍼, 여행 동료들이 보내준 엽서, 친구들과의 폴라로이드 사진, 가족사진, 감사의 말을 적은 작은 포스트잇 편지까지도 선물상자에 모아둔다. 수신자와 발신자의 관계가 변해도, 시간이 흘러 빛이 바래도 기록은 그때 그 순간으로 나를 돌려 보내준다. 누군가는 과거의 망령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다.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 죽는 것이 인간이다. 원피스에서 그랬다.


책을 옆에 내려놓자, 다른 상품들이 보인다. 노트, 필통, 연필, 연필깎이, 서점 할인 쿠폰 그리고 책방지기의 편지. 이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로고가 새겨진 연필과 연필깎이다. 청사진 창간호를 구매한 사람에게만 담겨 있는 상품일까 싶어 괜스레 기쁘다. 소수만 갖는 기록인가 싶다. 이것도 기록이라면 기록이다. 기분이 좋아진 김에 목사장에게 잘 받았다는 카카오톡을 보낸다. 그런데 이 쿠폰은 가서 사용해야하는 건가. 책 할인 받자고 성남에서 공주까지? 목사장에게 다시 톡을 보낸다.


[목사장, 나는 서울 오는 길에 책 배달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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