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0일
내 몸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내 일상에 가장 깊숙하게 스민 욕망 중 하나가 ‘마른 몸’이다. 아직 단 한 번도 원하는 몸무게로 살아본 적이 없어도 나에게는 목표 몸무게가 있다. 지금보다 10kg를 빼야하는 66kg. 이 욕망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마른 몸을 아름답다고 생각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144cm에 66kg의 스펙을 갖춘 작고 뚱뚱한 아이였다. 체육시간이면 운동장 구석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집에 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펑퍼짐한 라운드 티셔츠와 널널한 청바지, 키와 달리 큰 발은 나의 콤플렉스였고, 몸의 선이 보이는 운동은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아름답지 못한 몸을 보이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 그때의 생각은 지금까지도 박시한 맨투맨으로 내 몸을 가리고 롱패딩에 나를 숨기게 만든다.
가족들은 나를 ‘꽃돼지’라 불렀다. 꽃이라는 아름다운 수식어를 붙여도 돼지는 돼지인 꽃돼지다. 이 꽃돼지는 살 잔소리를 먹고 자랐다. 식탁에 앉으면 할머니는 항상 나에게만 밥 말고 반찬을 먹어야지 살이 빠진다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셨다. 식탁의 대화는 나의 살 이야기로 시작되어 살 이야기로 끝났다. 마른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만 뚱뚱한 것은 백조 가족 사이에 날지 못하는 오리로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있지만 혼자만 다르다는 소외감이 어린 나에게 사무치게 새겨 졌다. 이 애칭은 이십 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는 공포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몸의 판도가 뒤집어졌다. 별다른 노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말라갔다. 살이 다 키로 갈 거라는 어른들의 염려는 헛된 위로가 아니었다. 세탁소에 교복 바지를 가져가 28인치로, 정확히 28인치로 줄여달라고 떳떳하게 숫자를 외칠 때의 희열이란. 꽃돼지란 별명도 무색해졌고 식탁의 잔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할머니가 보약이라도 지어먹어야겠다는 그 소리를 잊지 못한다. 날지 못하는 오리에서 백조가 되었다는 희열감이 몰아쳤다. 몸에 자신감이 붙자, 더 이상 나는 체육시간에 구석에 앉아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친구들과 농구클럽에 들어갔고 민소매의 농구 유니폼을 당당하게 입고 다녔다. 살이 빠졌을 뿐인데 모든 게 바뀌었다.
하지만 마른 몸의 기쁨은 영원하지 않았다. 술을 먹으면 술살이 찌고 나이를 먹으면 나잇살이 붙듯, 생활만큼의 살이 붙었다. 십년이란 세월 동안 이유 없는 살은 하나 없었음에도 마른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은 더욱 심해졌다. 아무도 나를 뚱뚱하다 하진 않지만, 매일 체중계에 올라 나를 심판한다. 아침이면 체중계에 오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 되면 체중계에 오르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체중이 증가한 날에는 나를 혐오하고 체중이 감소한 날에는 나를 사랑한다.
자기애의 척도가 몸무게가 되어버린 나를 보며,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말한 플라톤은 뭐라고 말할까? 몸을 경시하고 생각에서만 존재를 찾는 데카르트는 뭐라고 할까? 사실 그 둘이 머라고 하든 상관없다. 몸이 영혼의 감옥이든, 생각이 존재의 시작이든 무엇이 중요한가. 오늘의 나는 몸(무게)를 보고 자신을 혐오하는 날에는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며 물로 허기를 달래고,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칼로리를 비교하고 SNS에 새로운 다이어트 광고가 보이면 무의식적으로 클릭부터 하고, 옷도 말라 보이는 검정색 옷만 입는다. 마른 몸을 향한 욕망은 나의 하루를 지배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저 몸 좀 봐, 아름답지 않아.]
[저 턱에 살 좀 봐. 저 옆구리에 살 좀 봐.]
나에게 몸은 존재의 기반이지만 타자이기도 하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 나의 몸을 타자화하고 평가한다. 거울에 앞에 선 순간만큼은 내 몸은 ‘저 몸’이다. 차가운 시선으로 머리부터 어깨를, 허리를 따라 발끝까지 훑어보며 냉혹한 말은 던진다. 시선에 박제된 몸은 하루의 모든 순간을 따라 다닌다. 젓가락을 움직이는 손을 묶고, 음식을 담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소화시키는 내장을 압박한다. 몸에 짓눌린 하루를 마무리하고 체중계에 오른다. 몸무게가 줄었다. 잠자는 순간만큼은 무게로부터 해방이다. 그래도 내일은 떡볶이를 먹고 싶다. 나는 몸과 투쟁관계에 빠져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