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2일
야구장은 그런 곳이에요
“가끔 꼴찌팀 운영팀장으로 힘들 때는
저 자리에서 앉아서
야구장을 보면 견딜만해져요.
그런 곳을 지켜주신 거예요. 단장님이.”
최근 나는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빠져 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보다가 드림즈 운영팀장 이세영 역을 맡은 배우 박은빈 씨의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작중에서 이세영은 프로야구 유일의 여성이자 최연소 운영팀장으로 10년째 드림즈 프런트에서 일해 왔다. 말 그대로 고(高) 스펙 보유했을 뿐 아니라 실무능력도 충분히 인정받았다는 말이다. 그런 이세영은 드림즈의 사장 권경민(배우 오정세)이 드림즈를 해체하려고 했을 때 수많은 러브콜이 쏟아졌을 텐데 프런트 주요 팀장들에게 자신은 드림즈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드라마가 지속될수록 이세영이 리그 만년 꼴찌 드림즈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가 이해가 된다. 그는 그만두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에.
스토브리그는 야구를 소제로 한 드라마이지만 실상은 기억에 빠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백승수(배우 남궁민)는 과거의 상처로 자신 이외에 존재에게 기대지 않는 사람이다. 야구를 하던 동생이 하반신 마비를 갖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여기는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차가운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또 드림즈의 4번 타자이자 국가대표 선발 타자 임동규(배우 조한선)는 유망주 시절 “천 원짜리 한 장씩 쥐어주던 아저씨, 쥐포 팔던 아줌마, 승리만을 바라며 응원하던 아이들”에 보답하기 위해 더 비싼 연봉을 제시하는 타 구단으로 가지 않고 드림즈에서 은퇴하고 싶어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기억이란 힘에 묶여 드림즈에 존재한다.
기억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삶의 방향성을 움직일 만큼. 태어나서 야구를 딱 두 번 본 나도 야구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야구 드라마를 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잡아먹을 만큼 느린 경기 속도와 그에 반해 순식간에 움직여서 눈으로 쫓아갈 수도 없는 공의 움직임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야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갓 입학할 시절 우리 집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다. 가족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좋은 펜션이나 리조트는 꿈도 꾸지 못했고, 4인용 텐트를 차에 싣고 다니며 산 중턱이나 들판 같은 곳에서 하루 머물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세상 물정 모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아버지에게 야구장에 가서 보고 싶다고 떼를 피웠다. 다음날, 형과 나 그리고 아버지 세 명의 입장권을 사기엔 부담스러웠던 아버지는 야구가 7회 초가 끝날 무렵 나와 형제를 야구장에 데리고 가셨다. 그날의 기억이 뚜렷하진 않아도 한화가 크게 지고 있던 날임은 분명했다. 입장객들이 아직 야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비원들은 우리를 못 들어가게 막았지만 우리 형제만이라도 들어가게 사정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야구장이 무서웠다. 입장권이 없으면 허락되지 않은 곳, 추억을 쌓기에도 무언가가 필요하고, 누군가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불가침 대가의 장소였다.
결국, 우리 형제만이 밀려 나오는 입장객들을 거슬러 올라 비밀스레 입장했다. 낯선 세상에 의지할 사람은 같이 온 형밖에 없었다. 형은 나보다 어른이었다. 아버지와 경비원의 대화를 이해하는 나이였고, 아버지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내 감정만큼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리에 앉자 형은 화를 냈다. 네가 떼를 써서 그렇다고. 니가 떼를 써서 지금 아버지가 화났다고. 아무도 모르는 낯선 세상에서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 혼만 났다. 야구를 보지 못했다. 아니 야구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랐던 야구는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온 가족이 함께 웃으며 즐기는 야구였다. 나는 행복한 기억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추억을 쌓고 싶었던 장소에는 찜찜한 기억만이 남았다. 스토브리그를 볼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십 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내 평생 아버지와 유일하게 놀러 간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구장에 방문한 기억이었다. 나에겐 지금도 가족과 행복한 추억을 쌓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나이를 먹으며 각자의 삶이 달라지고 사는 지역도 달라진 지금은 어린 시절 내가 꿈꾸었던 기억을 남기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그 욕망은 그 시기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같은 사람이더라도 그때와 같은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세상 물정 모르는 나, 어른들의 대화를 이해하기 시작 형, 퍽퍽한 삶을 버텨내던 아버지, 이 셋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억을 먹고 산다. 프로이트는 지금의 나는 나의 과거가 중첩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현실의 반응은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에 오롯이 공감할 순 없지만 쌓아온 기억이 상상 이상의 힘을 갖는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같은 장소를 다시 방문할 지라도 그 반복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메울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그 시절만의 추억에만 재생이 가능한 그런 차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