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갈릴리로 가요.

by 랑시에르

시차는 몸 안에 고인 눅눅한 습기처럼 나를 괴롭혔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졸았고, 그때마다 입안에는 비굴할 정도로 정직한 침이 고였다. 입가에 매달린 수치심을 닦아내며 내린 곳은 유대광야였다. 지평선 끝까지 밀려오는 탁 트인 허공. 그곳의 바람에는 오래된 책장 사이에서 날 법한, 바싹 마른 건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자그마치 이천 년의 시간이 퇴적된 성서의 무대 앞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비루한 눈곱을 떼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게 전부였다. 영광스러운 서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엔 내 몸이 너무 ‘생활’에 절어 있었던 탓이다.



기억은 자주 체한 것처럼 얹혀 있었다. 사실을 복원하기보다는, 제멋대로 일그러진 기억의 빈칸에 적당한 핑계를 써넣는 부실한 기록자가 된 기분이었다. 베드로의 장모가 살았다는 가버나움의 돌담을 먼저 만졌는지, 기름진 ‘베드로 물고기’를 입안에 먼저 밀어 넣었는지 순서조차 듬성듬성했다. 다만 갈릴리 바다를 가로지르던 배 위에서 찬양을 부를 때, 콧등을 타고 흐르던 그 짧고 뜨거웠던 ‘찡함’만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았다. 누군가는 신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메카를 향해 걷지만, 나는 12개월 할부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부채를 짊어지고 이 순례에 사활을 걸었었다. 매달 통장에서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숫자의 무게만큼, 내 영혼도 조금씩 분할 결제되고 있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애석하게도 내 안에서 교회와 하나님, 예수라는 단어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에 와서야 그 땅의 흙먼지가 자꾸만 혀끝에 맴돈다. 디셉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먹던 빵, ‘쿠브즈’의 퍽퍽한 질감이 자주 꿈속까지 밀고 들어왔다. 최근 탐독하고 어느 선교사님의 문장들이 내 무의식에 지피고 간 불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갈릴리 바다를 등지고 팔복의 언덕에 섰을 때, 우리 앞에는 부드러운 풀밭이 바람에 몸을 낮춘 채 쉬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구원의 서광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눈에 서린 지독한 ‘허기’였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다크서클처럼 드리워진 얼굴들. 가난이 지닌 특유의 비린내가 그들의 옷소매마다 배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서른 살의 인간 예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입을 뗐을 때, 그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제자들의 텅 빈 속을 채워주는 물리적인 허기 대용이었을까. 예수는 신의 아들이기 이전에, 고단한 숨을 몰아쉬는 제자들의 눈동자를 가장 먼저 읽어내지 않았을까. 그 서늘하고도 다정한 문답의 풍경 속으로, 나는 믿음도 없이 자꾸만 기웃거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