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일 년 전의 이야기다.
어쩌면 이 얘기는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을 바꿀지도 모른다. 태백산 자락에서 시작된 우리의 얼에 대한 이야기다.
그날도 비가 왔다.
A시는 유행이 끝난 지방 신도시였다.
낡은 레고 조각처럼 보이는 아파트와 흉가, 텅 빈 기차역. 12차선 도로는 잿빛 흉터처럼 보였다.
차는 굉음을 내며 비를 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도로 한가운데 앉아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검은 원피스, 맨발. 빗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다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그녀를 비췄다. 차를 급히 멈췄고, 숨을 고르며 차창 너머를 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저기요!"
빗소리가 내 목소리를 삼켰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경찰서로 간 그녀는 담요를 둘러쓴 채 조용히 떨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경찰들은 그녀의 신원을 묻지도, 보호자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며칠 뒤,
천안 직산의 서낭나무 아래 작은 기도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무당 선생님과 함께였다.
그날따라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사장님, 우리가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그 도로에서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도로 한가운데 있던 여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말을 삼킨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 길은 비가 내리던 그날과 닮아 있었다.
무당의 기도 시간은 밤 11시였다.
선생님은 나를 작은 기도당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오늘 천안의 주인 되는 서낭 할머니께 기도할 거예요.
가져오신 음식은 여기에 두시고, 함께 기도드립시다."
기도당은 작고 단출했다.
세 명이 앉을 정도의 공간에 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기도에 집중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누군가 내 앞에 서 있는 듯했다.
하늘색 한복, 허리에 달린 노리개, 손에는 부채를 든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사장님, 뭐가 보이나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하늘색 한복을 입은 분이요. 부채를 들고 계세요."
"더 집중해 보세요. 그분이 어떤 모습인지 보이나요?"
나는 흐릿하게나마 한복에 달린 노리개와 장신구를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조용히 기도를 멈추고 말했다.
"사장님 앞에 서 계시는 분이 조상님이세요.
아주 가까이 계셔서 더 뚜렷하게 보일 겁니다."
기도 중, 뒤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선생님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장면을 말했다.
"하얀 소복을 입고, 뒤짐을 지고 있는 할머니가 보여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맞아요.
그분이 바로 서낭 할머니세요.
기도하는 동안 누가 왔는지 항상 확인하시거든요.
그런데 도당 안에는 들어오시지 않아요."
나는 기도를 계속 이어가며 서낭 할머니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기도가 끝난 뒤 선생님은 탱화를 가리켰다.
탱화 속 인물은 내가 본 그대로였다. 하늘색 한복을 입고 부채를 든 모습. 그는 내 조상이자, 고려 말 판도판서공 김관이었다.
"이분 맞으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탱화 속 인물은 돌아가신 큰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김관은 판도판서로서 왕의 자문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선생님은 조상이 기도를 통해 나와 연결되었다고 말했다. 그 순간, 그가 남긴 비밀이 서서히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다시 한번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