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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는 게 답이다

[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 ] 05

by 사이에살다

2025년 여름, 한국은 사상 최장의 폭염을 겪었다. 유럽에서는 산불이 맹위를 떨쳤고, 파키스탄에서는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21세기 들어 기후위기(climate crisis)라는 말이 더 이상 경고용 문구가 아니라 현실의 진단이 되고 있다. 인간 활동이 배출한 온실가스(Greenhouse Gases, GHG)가 지구 대기 중에 머물며 복사열을 가두는 '온실효과'가 증폭되고, 이로 인해 지구 평균기온은 상승하고 극한 기후현상도 빈번해지고 있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의 평가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기온이 1.5℃ 이상 상승할 경우 해수면 상승·생태위기·식량불안 등이 급격히 증가한다. 전 세계는 이미 1.1℃ 상승했으며, 현재 추세대로라면 2100년까지 2.7℃ 이상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앙을 의미한다.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온실가스가 거론되고 있다. 현재 이산화탄소(CO₂)가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76%를 차지하며, 메탄(CH₄) 16%, 아산화질소(N₂O) 6%, 기타 수소불화탄소·염화불화탄소·삼불화황·육불화황 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기후위기는 단지 환경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정책·기술 전반을 뒤흔드는 문명의 위기다. 특히 온실가스 배출의 가장 큰 축인 에너지 분야의 전환은 인류적 과제로 떠올랐다. 에너지원·에너지 시스템·사회구조가 맞물려 작동해 온 현실 속에서, 단순히 연료만 바꾸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진정한 변화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글은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다룬 뒤, 에너지원과 사회시스템의 결합을 역사적으로 살피고, 시스템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독일 펠트하임 마을과 한국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2024년 폭염 관련 뉴스



1.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


에너지의 이해


'에너지'는 물리학적 개념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work capacity)을 의미한다. 사회적으로는 조명·난방·이동·생산·통신 등 인간이 일상과 경제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형태의 공급원과 인프라를 포함한다. 에너지의 확보와 이용 방식은 문명의 기반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인간 사회 발전의 동력이었다.

에너지원은 에너지로 활용 가능한 자원을 뜻한다. 운동에너지, 열에너지, 빛에너지로 사용 가능한 화석연료, 핵분열에너지로 사용 가능한 방사성 물질, 신재생에너지로 사용 가능한 태양, 풍력, 수력, 지열, 생물체, 수소 등이 주요 에너지원이다.

에너지는 흐름에 따라 1차와 2차 에너지로 분류될 수 있다. 1차 에너지는 오랫동안 자연의 변화에 따라 형성된 자연 상태 그대로 공급되는 에너지다. 화석연료, 수력, 원자력, 태양열, 지열 등이 속한다. 2차 에너지는 1차 에너지를 전환하여 생산되는 에너지로서 최종 소비 분야에 적정한 형태로 사용된다. 전력이나 가스, 석유화학제품 등이 여기에 속한다.


화석 연료 중심 에너지로 인한 갈등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석탄·석유·천연가스라는 화석연료(fossil fuels)를 대규모로 이용해 왔다. 이 에너지원은 높은 에너지 밀도와 저장·수송의 용이성을 제공했지만, 그 바탕에는 중대한 갈등과 비용이 존재했다.


온실가스 배출 : 이산화탄소(CO₂)를 비롯한 여러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하여 기후변화의 주범이 되었다.

이해의 불균형 : 에너지 생산과 소비에 따른 혜택과 불이익 사이에 불균형이 발생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의 책임과 피해 정도가 다르다. 선진국이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위기의 피해는 가장 적게 배출한 개발도상국과 섬나라들이 먼저 겪고 있다.

환경피해와 사회비용 : 화석연료의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출사고, 중금속 오염, 산성비, 미세먼지 등 부작용이 심각하다. 탄광 사고나 석유 유출 사고는 지역 생태계를 파괴하고 주민 건강을 위협한다.

지정학적 갈등 : 석유·가스의 공급과 시장은 국제정치의 요충이며, 자원 의존 구조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1970년대 석유 파동,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 등은 에너지가 정치·경제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경제적 불평등 : 에너지 접근성이 낮은 국가·지역은 성장의 제약을 받고, 탄소 경제에 기반한 구조는 전환이 어렵다. 전 세계 약 7억 5,900만 명(2019년 기준)이 전기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세대 불균형 : 화석연료는 고갈성 에너지원이자 산업 자원이기에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현세대가 편리하게 사용한 화석연료의 대가를 미래 세대가 치르게 된다.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


그런데 왜 에너지 전환이 필요한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분야가 바로 에너지 분야이다.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분야(산업⋅교통⋅건물 사용 에너지)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의 73.2%를 차지했다.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 대비 2019년에 약 131% 증가했으며, 이 중 에너지 관련 배출은 2021년 기준 약 86.9%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순히 에너지원만 바꾼다고 '에너지 전환'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전환이라는 말에는 생산·공급뿐 아니라 소비와 효율 그리고 사회구조가 포함되어야 한다. 한국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보고서는 "에너지 전환은 전체 에너지 분야에서 혁신을 의미하며 단순히 발전원 믹스를 바꾸는 정적 변화가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원만 바꾸자는 뜻이 아니라, 관련 시스템을 바꾸고 사회적 조건을 재설계하자는 의미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풍력 발전소를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분배하는 시스템, 수요를 관리하는 제도, 시민이 참여하는 거버넌스가 함께 작동해야 진정한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진다.


화석연료 중심 에너지는 세계적으로 여러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2. 에너지와 사회: 역사가 증명하는 에너지 시스템


화석연료를 통해 우리는 에너지와 사회시스템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에너지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한다.


석탄 사회: 석탄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석탄(coal)을 이용해 증기기관·철도·공장을 발전시켰다. 1712년 토머스 뉴커먼이 발명한 증기기관은 광산의 물을 퍼내기 위해 사용되었고, 1769년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석탄 채굴과 증기기관은 상호 촉진 관계였다. 석탄 수요가 증가하면서 더 깊은 지하 채굴이 필요했고, 이는 더 강력한 증기기관 개발을 촉진했다. 석탄 운반을 위한 레일, 도르래, 배수펌프, 통풍 기술, 안전등 등이 함께 발달했다.


증기기관이 등장하자 본격적으로 산업 분야에서 석탄 사회가 형성되었다. 공장제 제조업은 석탄과 증기기관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산업용 생산기기에 증기기관을 결합하여 공장이 등장했고, 도시 노동자가 증가하며 산업 생산과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제철, 기계 등 연관 분야 산업이 함께 발달했다.


교통 발달은 석탄 사회의 확장을 상징한다. 1825년 스톡턴-달링턴 화물 노선(밀가루 80톤, 시속 39km)이 개통되었고, 1829년 리버풀-맨체스터 여객 노선(총연장 97km)은 운하를 대체하며 여객 수송의 혁명을 일으켰다. 철도 기술 발달로 탄전에서 먼 지역에서도 산업 발달이 가능해졌다. 또한 증기선의 발달은 영국을 해양 제국으로 만들었다. 1858년 최초의 증기선 그레이트 이스턴호가 건조되면서 장거리 항해가 가능해졌다. 이는 영국의 해군력 강화, 영국제국 운영, 인적 자원 이동, 물류 운송 등을 가능하게 했다.


석탄 기반 산업사회는 노동집약적 공장제 경제체제를 형성하면서, 산업도시가 성장하게 하였다. 또한 중산층과 노동자층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석탄 시스템은 노동자와 자본, 도시와 농촌을 잇는 구조적 틀이었다. 19세기 영국 사회의 변화—도시, 계층, 대량생산, 소비문화, 교통, 무역, 인적 교류—는 모두 석탄이라는 에너지원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석탄 생산량 감소 및 채굴 생산비용 증가로 인해 대체 에너지원으로 석유가 부상했다.


석유 사회: 석유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


20세기 들어 석유(oil)가 산업경제의 중심에 섰다. 19세기 후반 석유 산업이 등장했다. 1850년대 이후 본격적인 유정 발굴이 시작되었고, 증기기관을 이용한 원유 채굴 정유 시설이 설치되었다. 1870년 존 D. 록펠러가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하면서 서구 대자본으로 아랍 석유 개발이 시작되었다.


정유 기술 발전으로 석유를 연료로 사용할 가능성이 열렸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등장은 석유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휘발유와 경유를 연료로 하는 자동차가 개발되었고, 헨리 포드의 표준화 대량생산 방식은 자동차를 대중화했다. 교통기관의 연료도 모두 석유로 전환되었다. 선박 연료인 중유, 항공기 연료인 등유, 기차 연료인 경유, 자동차 연료인 휘발유와 경유—20세기 석유는 교통 연료이자 산업 재료로 현대 산업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자동차, 항공, 플라스틱, 석유화학 산업 등이 석유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석유 자본–국가–기업의 결합이 생겼고, 중동정세·유가사태·자원전쟁 등의 갈등도 석유 경제가 만들어냈다. 석유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은 대량생산·소비문화·세계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기후위기와 자원 고갈의 근원이기도 했다.


에너지는 시스템이다


이처럼 에너지는 사회경제적–정치적–기술적–문화적 시스템과 얽혀 있다. 석탄은 증기기관, 철도, 공장, 도시, 노동조합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었다. 석유는 자동차, 고속도로, 교외 주거지, 소비문화라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었다. 에너지원마다 나름의 사회기술시스템을 형성한다. 따라서 에너지에 대해서는 시스템 접근이 필요하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논할 때 단지 '풍력·태양광'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저장·그리드·수요관리·정책프레임·시장구조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에 '바꾸는 게 답이다'라는 표현은 에너지원 변경을 넘어 에너지 시스템 전환을 지향해야 함을 시사한다.


레인힐에서 증기기관차 성능 테스트가 이루어졌다.


3. 시스템 전환으로서의 에너지 전환


시스템 전환 관점에서 보는 에너지 전환 개념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지만, 제대로 의미를 담으려면 시스템 전환(system transition)이라는 개념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 즉, 기술혁신뿐 아니라 정책·제도·인프라·문화·시장·거버넌스 등 복합적인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시스템의 변화이다.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기반 한 중앙 집중적이며 중앙 집권적인 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에너지 절약과 효율 개선으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재생가능에너지 이용을 늘려가는 시스템으로 전환이다. 이 전환은 지역 분산적이며 민주적인 에너지 시스템을 추구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에너지 전환은 크게 4가지 방향성을 보인다.


탈중앙화(Decentralization) : 생산과 소비의 지역화, 지방 분산 체계화. 거대한 중앙 발전소에서 생산하여 먼 곳까지 송전하는 방식에서,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한다.

탈탄소화(Decarbonization) : 온실가스 배출 저감/제로, 에너지 체계의 친환경화. 화석연료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여 탄소 배출을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제로로 만든다.

디지털화(Digitalization) : 에너지 관리 체계의 스마트화(건물, 공장), 생산자/소비자 네트워크 구축. 스마트그리드, IoT, AI 기술을 활용하여 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실시간으로 최적화한다.

민주화(Democratization) : 시민 참여 실질화, 지역 에너지 계획, 에너지 자립 마을.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결정권을 시민과 지역사회가 가지며, 에너지 협동조합 등을 통해 참여한다.



독일의 에너지 전환 사례: 펠트하임 마을


독일의 '에너지전환(Energiewende)'은 세계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례다. 독일은 화석연료와 핵발전에 의존하던 에너지 시스템에서 재생가능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다. ‘2045년까지 기후중립(Climate Neutrality) 도달, 2030년까지 전력 부문 온실가스 배출 65% 감축’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지역별로 시민발전 협동조합을 활성화시켜 에너지 전환에 지역주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지역 분권형으로 분산적으로 전력을 생산하며 생산과 저장 및 소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스마트그리드 기술을 도입하였다.


농촌 마을인 펠트하임(Feldheim) 마을은 에너지 전환의 교과서적 사례다.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브란덴부르크 주의 이 작은 마을은 인구 약 130~150명에 불과하지만, 독일 최초이자 유일한 에너지 완전 자립 마을이다.


펠트하임의 에너지 전환 역사는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지역 기업가가 펠트하임의 첫 풍력 발전기 설치 비용을 지불했다. 펠트하임은 브란덴부르크에서 가장 높고 바람이 많이 부는 평지였기에 풍력 발전에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펠트하임은 강한 바람과 광활한 땅을 가지고 있어 대규모 풍력 발전기 클러스터에 완벽했다. 농민들은 우유, 감자, 사탕무의 가격이 하락하고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자, 자신의 토지를 에너지 회사에 임대하여 풍력 발전기를 설치하면 현금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5년까지 풍력 발전기는 47기로 확대되었으며 총용량은 74MW에 달한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91MW까지 확장되었다고도 한다.


2008년, 펠트하임은 바이오가스 발전소를 건설했다. 지역 농업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이 발전소는 돼지와 소 분뇨 3,500㎥, 옥수수 6,125톤, 곡물 650톤을 연간 처리한다. 바이오가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는 공공 시장에 판매되지만, 전력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은 별도로 설치된 난방 그리드를 통해 마을의 가정, 상업시설, 가축우리를 난방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인근의 폐쇄된 군사기지에 태양광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이 발전소는 연간 약 600 가구의 전력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게다가 추운 겨울에는 현지 숲의 고목을 사용하여 생산한 목재 칩을 연료로 하는 난방 발전소가 추가 난방을 공급한다.


2009년부터 펠트하임은 재생에너지로 자체 에너지를 모두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대형 전력회사 E.on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 위해 자체 전력망과 난방망 구축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2010년, 독일에서 유일하게 자체 마이크로그리드를 가진 마을로서 펠트하임은 완전한 에너지 독립을 달성했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이웃 지역보다 훨씬 낮은 에너지 비용을 부담하며,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기와 난방 공급이 이루어졌다.


고용 측면에서도 성과가 뚜렷하다. 브란덴부르크 주의 다른 마을들이 30% 이상의 실업률로 고통받는 동안, 펠트하임은 거의 완전 고용 상태다. 에너지 회사 직원, 바이오가스 플랜트 운영자, 풍력 터빈 유지보수 기술자 등 약 50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환경적 성과는 더욱 인상적이다. 펠트하임은 연간 자체 소비량의 200배가 넘는 에너지를 생산한다. 풍력 발전소는 연간 약 1억 6,300만 kWh의 전력을 생산하며, 이는 약 5만 가구의 전력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양이다. 생산된 에너지의 대부분은 공공 전력망에 판매되어 수익을 창출한다. 펠트하임 마을은 방문객 센터를 운영하여 매년 수천 명의 방문객을 맞이한다. 학생, 정치인, 에너지 전문가들이 펠트하임을 찾아 에너지 전환의 실제 사례를 배운다. 마을은 단순히 에너지 자립을 넘어, 다른 지역사회가 따라 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펠트하임 사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지역사회의 주도권과 참여다. 외부 전문가나 대기업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결정하고 투자하고 실행했다. 둘째, 다양한 재생에너지원의 결합이다. 풍력, 태양광, 바이오가스를 조합하여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실현했다. 셋째, 경제적 실행 가능성이다. 초기 투자는 컸지만,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익이 분명하다. 넷째, 정부 지원의 중요성이다. EU와 주 정부의 보조금이 초기 투자 부담을 덜어주었다.


물론 펠트하임 모델이 모든 곳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바람이 약한 지역, 농업이 아닌 산업 중심 지역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펠트하임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에너지 전환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이처럼 독일 사례는 단지 '발전원을 바꾼다'가 아니라 에너지 공급·소비·시장·거버넌스 전반을 바꾼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에너지 전환은 기술 혁신과 사회 혁신이 만나는 지점에서 실현된다.




4. 한국 에너지 전환의 현재와 과제


한국 에너지 전환 현황

한국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 높은 화석연료 의존도, 원자력 발전 비중 등으로 에너지 전환의 과제가 크다. 한국의 1차 에너지 공급에서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기준 약 81%에 달한다. 재생에너지 비중은 약 8.6%로 OECD 평균 12.5%에 크게 못 미친다. 전력 생산 측면에서 보면, 2023년 한국의 발전 믹스는 석탄 30.7%, LNG 27.0%, 원자력 31.5%, 재생에너지 9.3%, 기타 1.5%로 구성되어 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2020년 한국 정부는 2050 탄소중립(net-zero) 목표를 선언했다.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 40% 감축을 국가 감축 목표(NDC)로 제시했다. 2024년 발표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38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30.6%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담았다. 이는 현재 대비 약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구체적으로 태양광 발전 설비를 2023년 27.7GW에서 2038년 93.9GW로, 풍력 발전을 2.1GW에서 37.6GW로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해상풍력 개발에 집중하여 35.3GW를 설치하려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가장 큰 장애는 ‘간헐성 문제’다. 태양광은 밤에, 풍력은 바람이 없을 때 전력을 생산하지 못한다. 이를 보완할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과 스마트그리드 투자가 부족하다. ‘사회적 수용성’ 문제도 크다. 재생에너지 설비가 들어서는 지역에서 주민 반대가 빈번하다. 산지 훼손, 소음, 경관 파괴, 재산권 침해 등이 주요 갈등 요인이다. 펠트하임처럼 주민들이 주도하고 이익을 공유하는 모델이 아니라, 외부 기업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이 많아 갈등이 심화된다. ‘전력 시장 구조’도 문제다. 한국전력이 독점하는 송배전망과 경직된 전력 시장 구조는 분산형 재생에너지 확대를 어렵게 만든다. 전력 거래 제도, 요금 체계, 송배전망 접속 기준 등이 중앙집중형 화석연료 시대에 맞춰져 있다.


시스템 전환 관점에서 보는 한국 에너지 전환의 과제


한국이 진정한 에너지 시스템 전환을 이루려면 단지 재생에너지 확대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발전원 다변화 및 탈석탄 로드맵 강화다. 현재 석탄 발전 비중 30.7%를 빠르게 줄여야 한다. 2030년까지 석탄 발전을 21.8%로 낮추겠다는 계획이 있지만,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더 과감한 감축이 필요하다. 석탄 발전소 조기 폐쇄와 전환을 가속화해야 한다.


둘째, 수요 관리 및 효율 향상이다. 공급 측만이 아니라 수요 측 혁신이 중요하다. 한국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산업 부하, 수송, 건물 난방 등에서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한다. 제로 에너지 빌딩, 고효율 가전제품, 산업 공정 효율화 등이 필요하다.


셋째, 전력망 및 저장 기술 확충이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할 대규모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스마트그리드, 수요 반응(demand response) 시스템 투자가 시급하다.


넷째, 시장·제도 개혁이다. 재생에너지 투자를 촉진할 인센티브, 전력 시장 구조 개편, 지역 참여형 모델 확산 등 거버넌스 측면 변혁이 요구된다. 전력 요금 체계도 재생에너지 확대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다섯째, 사회적 수용성과 시민 참여 확대다. 독일 펠트하임 사례에서 보았듯, 지역주민 참여와 협동조합 모델이 전환의 핵심이었다. 한국에서도 지역 및 시민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에너지 협동조합, 시민 발전소, 커뮤니티 에너지 프로젝트 등을 활성화하고, 수익을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여섯째,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다. 석탄 발전소 폐쇄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 에너지 전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취약 계층을 보호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재교육, 새로운 일자리 창출, 에너지 복지 확대 등이 동반되어야 한다.


일곱째, 국제 협력과 기술 혁신이다. 에너지 전환은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 협력을 통해 기술을 공유하고, 공동 R&D를 추진하며, 재생에너지 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에 참여해야 한다. 한국은 태양광 패널, 풍력 터빈, 배터리, 수소 기술 등에서 경쟁력을 갖출 잠재력이 있다.


이처럼 한국의 에너지 전환 과제는 기술적 교체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포함한 패러다임 전환이다. 단순히 석탄 발전소를 태양광 패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거래하는 방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방식 전체를 바꿔야 한다.


한국의 희망적 사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도 희망적인 사례들이 있다. 서울시는 '원전 하나 줄이기' 프로젝트를 통해 에너지 절약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동시에 추진했다. 2023년까지 누적 에너지 생산량과 절감량이 원자력 발전소 4기 분량에 달했다. 제주도는 2030년까지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목표 아래 풍력과 태양광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약 20%에 달하며, 전국에서 가장 높다. 전남 신안군은 주민 참여형 태양광 사업을 추진하여 주민들이 직접 투자하고 수익을 공유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이는 독일 펠트하임의 시민 참여 모델을 한국식으로 적용한 사례다. 부산 에코델타시티는 스마트그리드 실증 단지로, 태양광·연료전지·ESS를 결합한 마이크로그리드를 구축하고 있다. 건물 에너지 관리 시스템(BEMS)을 통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에서도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며,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시도를 확산시키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이다.




5. 맺음말: 바꾸는 것이 답이다


"바꾸는 게 답이다"는 단순히 연료만 바꾸자는 말이 아니다. 온실가스를 줄이고 기후위기를 완화하려면, 에너지 시스템 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에너지원의 변화는 출발점이지만, 그 위에 놓인 시장구조, 거버넌스, 소비문화, 기술 인프라, 참여 모델 등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석탄이 만든 19세기 산업사회, 석유가 만든 20세기 소비사회를 거쳐, 우리는 이제 재생에너지가 만들 21세기 지속가능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이 전환은 단순한 기술 교체가 아니라 문명의 전환이다.


기후위기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바꾸는 것이 곧 답이다. 에너지 시스템을 바꾸고, 사회구조를 바꾸고, 참여하는 시민의 역량을 바꿈으로써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야 한다. 이제 응답할 시간이다. 온실가스 수치가 아닌 거버넌스 수치가, 연료 비율이 아닌 시민 참여 지수가 전환의 기준이 되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펠트하임이 증명했듯, 작은 공동체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한국의 마을들, 도시들, 지역사회들도 자신만의 에너지 전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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