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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OUTBREAK

[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 ] 04

by 사이에살다

2020년, 전 세계는 COVID-19라는 신종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국경이 봉쇄되고, 도시가 멈췄으며, 일상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 전염병은 반복적으로 인류를 습격했고, 그때마다 문명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전염병이란 어느 한 지역 혹은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감염성 질환을 말한다. 그러나 전염병은 단순히 질병 발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사회구조를 뒤흔들고, 인구 이동의 패턴을 바꾸며, 위생제도를 재편하고, 과학기술 체계를 혁신시킨다. 나아가 정치·경제·문화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COVID-19를 통해 전염병이 현대 사회의 글로벌화·이동성·복잡한 네트워크 시스템과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과거에도 전염병은 단순히 의료적 사건이 아니라, 과학기술 체계가 어떻게 대응하고 사회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거울이었다. 이 글에서는 인류 역사를 바꾼 주요 전염병들 통해 전염병이 과학기술과 사회가 어떻게 충돌하고 상호작용했는지를 고찰한다. 그리고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는지를 살펴본다.




1. 전염병이란 무엇인가


전염병은 일반적으로 전염성 있는 병원체(바이러스·박테리아·기생충 등)가 사람 간 또는 벡터(벼룩·모기 등)를 통해 확산되어 다수에게 발생하는 질환이다. 지역적 확산(epidemic)에서 국경을 넘어서는 세계적 유행(pandemic)까지 그 규모는 다양하다.


인류 역사상 전염병은 반복적으로 출현해 왔다. 고대 부족 집단부터 근대 산업사회까지, 인구 밀집·이동·무역의 확장은 전염병 확산을 가속시켰다. 로마 제국을 연결하던 도로망과 지중해 해상 교역 네트워크는 페스트의 유럽 확산 경로가 되었고, 대서양 횡단 항로는 두창을 미대륙으로 전파했다.


또한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전염병의 피해 정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였다. 빈곤·영양 결핍·위생 불량·전쟁과 인구 이동 등은 전염병의 피해를 증폭시켰다. 반대로 깨끗한 물, 충분한 영양, 위생적인 환경을 갖춘 집단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이렇게 보면 전염병은 과학기술 수준, 의료 체계, 위생 인프라, 사회 정책의 수준을 동시에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염병이 단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염병은 인간의 생활양식, 기술 체계, 인프라(도로·교통·통신), 위생 관념, 의료 체계, 그리고 권력과 제도가 결합된 복합적 사건이다. 따라서 전염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병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사회구조의 상관관계를 함께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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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역사



2. 두창: 제국을 무너뜨린 바이러스


두창의 특징


두창(smallpox)은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고열과 함께 전신에 수포가 발생하는 것이 특징이다. 치명률은 약 30%에 달했고, 생존자조차 평생 남는 흉터와 시력 저하 등의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특이한 점은 한 번 감염되어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면역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두창은 인간에서 인간으로만 전파되며, 동물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면역이 없는 집단에 전파될 경우 치명률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특성은 15~16세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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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창 바이러스


두창과 아즈텍 문명의 몰락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아즈텍 제국의 인구는 약 1,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1520년, 쿠바에서 도착한 스페인 원정대에 두창에 감염된 아프리카 노예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 바이러스는 빠르게 아즈텍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퍼져나갔다. 두창은 한 해 만에 테노치티틀란 인구의 40%를 죽였고, 전체적으로는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까지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아즈텍인들은 이 질병을 '위대한 나병(hueyzahuatl)' 또는 '고름혹(totomonaliztli)'이라고 불렀다.


두창이 아즈텍에 미친 영향은 다층적이었다. 첫째, 직접적인 사망이다. 특히 영아와 어린이의 사망률이 높았다. 둘째, 사회 기능의 마비다. 환자를 돌보느라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이는 기근으로 이어졌다. 셋째, 지도력의 상실이다. 아즈텍 황제 쿠이틀라우악(Cuitláhuac)을 포함한 많은 지도자들이 두창으로 사망했다. 넷째, 심리적 타격이다. 스페인인들은 이 병에 면역이 있었지만, 아즈텍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이는 스페인 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1521년 5월, 코르테스는 재편성한 군대와 11만~15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했다. 80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8월 13일, 테노치티틀란이 항복하면서 아즈텍 제국은 멸망했다. 역사학자들은 두창이 없었다면 스페인의 정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사례는 전염병이 단순히 질병이 아닌 제국의 몰락, 문명 교체의 촉매가 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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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창에 걸린 아즈텍 사람들


두창에 대한 인류의 대응과 근절


두창에 대한 대응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했다. 12세기 중국에서는 이미 '인두법(人痘法)'이 사용되었다. 이는 두창 환자의 고름을 건강한 사람에게 접종하여 가벼운 증상으로 면역을 획득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18세기에는 이 방법이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졌다. 1796년,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우두(牛痘, cowpox)에 걸린 사람은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우두를 이용한 예방접종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백신이었다. 19세기 초, 제너의 우두법은 조선을 포함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두창 백신 접종이 보편화되면서 두창으로 인한 사망률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자연 발생 두창 환자가 기록된 후,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인류가 두창을 완전히 근절했다고 선언했다. 이는 인류가 예방접종, 국제 협력, 감염병 감시 체계의 결합을 통해 전염병을 완전히 제거한 첫 번째 사례였다. 과학기술과 국제 협력의 힘을 보여준 역사적 쾌거였다.



3. 흑사병: 중세 유럽을 재편한 전염병


흑사병


흑사병(plague)은 박테리아 Yersinia pestis에 의해 발생하며, 벼룩을 통해 쥐에서 사람으로 전파된다. 증상으로는 림프절 부종(buboes), 고열, 두통, 구토, 출혈 등이 있다. 림프절 부종이 주로 사타구니, 겨드랑이, 목 부위에 나타나며, 검은 반점이 피부에 생긴다. 치료하지 않을 경우 치명률이 30~75%에 달했고, 폐페스트의 경우 거의 100%였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 팬데믹(1346–1353)은 유럽 인구의 약 30~60%에 달하는 사망자를 냈다. 교황 클레멘트 6세의 조사관들은 1351년 기독교 유럽에서만 2,384만 명이 사망했다고 계산했다. 당시 유럽 인구가 약 7,500만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약 3분의 1이 사망한 것이다. 이 대유행은 1347년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구에서 시작되었다. 크림반도에서 온 상선이 도착했는데, 선원 대부분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쥐와 벼룩을 함께 데려왔고, 이것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흑사병은 무역로를 따라 빠르게 확산되었다. 항구 도시에서 시작하여 육로와 해로를 따라 내륙으로 침투했다. 영국에서는 인구가 1400년경에는 100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고, 약 1,000개의 마을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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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대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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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흑사병 유행


중세 봉건제의 붕괴 그리고 검역제도 탄생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 구조에 근본적인 충격을 주었다. 가장 큰 변화는 노동력 부족이었다. 농노와 노동자의 대량 사망으로 노동력이 희소해졌고, 이는 임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봉건 영주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야 했다. 역사학자 R. H. 힐턴은 생존한 영국 농민들의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주장한다. 많은 유럽인들에게 15세기는 번영과 새로운 기회의 황금기였다. 토지는 풍부했고, 임금은 높았으며, 농노제는 거의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봉건제 기반의 인구-토지 중심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동했고, 일부는 도시로 유입되었다. 도시-상업 경제의 성장은 봉건제를 넘어 근대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화폐 경제가 확대되고, 상인 계급이 성장하며, 중앙집권적 국가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흑사병의 경험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검역(quarantine) 제도 탄생으로 이어졌다. 14세기말 달마티아의 항구 도시 라구사(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가 최초로 30일 격리 제도를 법제화했다. 이후 베네치아가 40일 격리 기간을 도입했는데, '검역'이라는 단어도 이탈리아어로 '40일'을 뜻하는 'quaranta giorni'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검역 제도는 근대 공중보건 체계의 토대가 되었다. 감염자 격리, 선박 통제, 국경 봉쇄, 위생 검열 등이 이후 감염병 대응의 핵심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검역소와 격리 병동, 그리고 COVID-19 대응 과정에서 시행된 봉쇄 조치까지, 그 기원은 모두 14세기 흑사병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4. 콜레라: 산업화 시대의 전염병


콜레라의 특징과 전파


콜레라는 박테리아 Vibrio cholerae에 의해 발생하며, 오염된 물 또는 식품 섭취로 전파되는 수인성 전염병이다. 증상으로는 심한 설사, 구토, 탈수 등이 있으며, 치료하지 않으면 몇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쌀뜨물 설사'라 불리는 특징적인 증상 때문에 진단이 비교적 용이했다. 19세기 이후 콜레라는 산업화와 도시화, 인구 이동, 국제 무역 증가와 함께 팬데믹 형태로 수차례 확산했다. WHO에 따르면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여섯 차례의 대유행이 있었으며, 1961년부터 시작된 제7차 팬데믹은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다.


산업혁명과 콜레라의 확산


콜레라는 위생·상하수도·건강 체계가 미비한 지역에서 특히 피해가 컸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도시 환경은 콜레라 확산의 최적 조건이 되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지만, 상하수도 시설은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비위생적인 빈민가에 밀집해 살았고, 오염된 물을 마셨다.


19세기 중반 런던의 인구는 250만 명에 달했지만, 하수 처리 시설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지하실이나 마당에 오물을 버렸고, 이는 지하수를 오염시켰다. 템스 강은 미처리 하수로 가득했고, 이 강물이 식수원이 되었다. 1831년부터 1849년까지 영국과 웨일스에서만 콜레라로 7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콜레라의 확산 패턴은 산업화 시대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반영했다. 제국주의 확장, 식민지 지배, 군대 이동, 무역선의 증가, 종교 순례(메카 순례 등), 노동자의 대규모 이동—이 모든 것이 콜레라 확산의 통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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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콜레라에 대한 일본인의 두려움을 담은 그림



5. 과학기술의 발전과 전염병 대응


병원체 연구의 혁명


19세기 후반, 미생물학의 발전은 전염병 대응에 혁명을 가져왔다.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발효와 부패가 미생물에 의한 것임을 밝혔고, 질병 역시 미생물이 원인임을 증명했다. 그는 백신 개발에도 성공하여 1880년 닭콜레라 백신, 1885년 광견병 백신을 개발했다.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는 질병의 세균론을 확립했다. 그는 탄저균, 결핵균, 콜레라균을 발견했고, 특정 미생물이 특정 질병을 일으킨다는 '코흐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현대 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항생제의 개발과 명암


20세기 항생제의 개발은 세균성 전염병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기술적 돌파구였다. 1910년 파울 에를리히와 하타 사하치로는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 606호를 개발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했고, 1940년대 하워드 플로리와 언스트 체인이 이를 정제하고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페니실린은 '기적의 약물'로 불리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이후 다양한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인류는 세균성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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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노우와 역학조사


콜레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영국 의사 존 스노우(John Snow, 1813-1858)다. 1854년 8월 31일, 런던 소호의 브로드 스트리트(현 브로드윅 스트리트) 부근에서 콜레라가 대발생했다. 3일 만에 127명이 사망했고, 일주일 만에 주민의 4분의 3이 피난을 갔다. 9월 10일까지 500명이 사망했으며, 최종적으로 616명이 목숨을 잃었다.


스노우는 사망자의 주소를 지도에 표시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사망자 발생 장소와 지하수 펌프의 위치를 지도에 점으로 찍자, 브로드 스트리트 40번지의 펌프 주변에 사망자가 집중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스노우는 지방의회를 설득하여 펌프 손잡이를 제거하도록 했다. 그러자 콜레라 발생은 즉시 감소하기 시작했다. 후속 조사에서 최초 발병자의 집 정화조가 펌프의 저수조와 지하에서 매우 가깝게 위치해 있고, 정화조 벽이 심하게 부식되어 오염물이 지하수로 스며들었음이 밝혀졌다.


스노우의 연구는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임을 증명했고, 이는 공중보건 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의도치 않게 역학 조사(epidemiology)와 질병 지도(disease mapping)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창시했으며, 오늘날 '현대 역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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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노우가 그린 콜레라 역학 지도. 펌프가 표시되어 있으며 사망자 수를 굵은 검은 선으로 표시했다.


위생 개혁 운동의 시작


또한 콜레라의 경험은 위생 개혁(hygiene reform) 운동으로 이어졌다. 1842년, 영국의 사회 개혁가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은 《영국 노동 인구의 위생 상태(The Sanitary Condition of the Labouring Population)》 보고서를 발표하여 빈민층의 비위생적 생활환경이 질병의 근본 원인임을 지적했다. 1848년 영국은 최초의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을 제정했다. 이 법은 상하수도 시설 설치 및 개선, 오물 폐기 규제, 공중 보건 위원회 설치 등을 규정했다. 이후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현대적인 상하수도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는 도시 위생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공중보건 개념의 탄생은 단순히 의학적 진보가 아니었다. 국가가 국민의 건강에 책임을 진다는 현대적 복지국가 개념의 출발점이었다. 깨끗한 물, 위생적인 환경, 질병 예방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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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성 전염병 온상이 된 런던 탬즈 강



6. 새로운 위협: 슈퍼박테리아와 신종 전염병


슈퍼박테리아의 출현


항생제 내성균은 '과학기술에 의해 통제된 전염병'이 다시 통제 불능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콜레라균의 항생제 내성도 증가하고 있다. 2016년 예멘에서 발생한 콜레라 대유행은 항생제 내성 균주가 포함되어 있어 치료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슈퍼박테리아가 출현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첫째, 항생제 남용이다. 의료 현장에서 불필요하게 항생제가 처방되고, 축산업에서 성장 촉진제로 항생제가 남용되었다. 둘째, 환자들이 처방된 항생제를 끝까지 복용하지 않아 내성균이 살아남는다. 셋째, 병원 내 감염 관리 소홀로 내성균이 확산된다. 이로 인해 인간 사회는 '포스트항생제(post-antibiotic)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간단한 상처나 수술 후 감염도 치명적이 될 수 있는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보험제도와 항생제 남용


흥미롭게도 경제·사회 구조 및 제도도 항생제 남용에 영향을 미쳤다. 의료보험 제도와 접근성, 국가의 공중보건 역량, 제약 산업의 상업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일부 국가에서는 의료보험 제도가 진료 횟수나 처방 약품 수에 따라 보상하는 구조여서, 의사들이 불필요하게 항생제를 처방하는 유인이 생겼다. 또한 제약 회사들이 새로운 항생제 개발보다는 수익성이 높은 만성질환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항생제 개발 속도가 내성균 출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까지 항생제를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었고, 이는 항생제 오남용으로 이어졌다. 2000년 의약분업 이후 항생제 사용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OECD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은 과학기술만으로 전염병을 해결할 수 없으며, 사회·경제·정책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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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박테리아 생성 원리


기후변화와 신종 전염병


21세기 전염병의 새로운 도전은 기후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지구 온난화로 모기와 같은 매개체의 서식지가 확장되면서, 말라리아, 뎅기열, 지카바이러스 같은 열대 질병이 온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삼림 벌채와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로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촉이 증가하면서, 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파되는 인수공통전염병(zoonotic diseases)이 급증하고 있다. 에볼라, SARS, MERS, COVID-19 모두 동물에서 유래한 바이러스다. WHO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간 출현한 새로운 전염병의 75%가 동물 유래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가 계속된다면, 신종 전염병의 출현 빈도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전염병과 사회: 불평등의 거울


전염병은 사회의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에 살고, 영양 상태가 나쁘며,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낮아 전염병에 더 취약하다. COVID-19 팬데믹도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감염률과 사망률이 높았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콜레라는 빈민가를 휩쓸었지만, 깨끗한 물을 사용하는 부유층은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흑사병 시기에도 도시를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귀족들은 시골로 피신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오염된 도시에 갇혀 있어야 했다. 전염병 대응에서 사회적 연대와 형평성은 단순히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실용적 필수조건이다. 일부만 보호받고 다른 이들이 방치된다면, 전염병은 계속 확산될 것이다. 모두가 안전해야 모두가 안전하다는 교훈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7. 마치며 : 아웃브레이크를 넘어서


전염병 아웃브레이크는 단순히 질병의 생물학적 확산이 아니라, 과학기술·사회구조·정책이 격돌하고 변화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두창·흑사병·콜레라의 역사는 인류가 어떻게 전염병과 싸워왔는지, 어떤 기술을 만들었으며, 그 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역사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 전염병은 단순히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빈곤, 불평등, 비위생적 환경이 전염병을 키운다. 둘째, 과학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백신과 항생제를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이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제공하는 사회 시스템이 중요하다. 셋째,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전염병은 국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종 전염병, 항생제 내성균, 글로벌 이동성과 기후변화 등 복합적 요인이 결합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COVID-19 팬데믹은 21세기 전염병이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고, 얼마나 깊이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기술적 해결책만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윤리·연대의 틀까지 포함한 통합적 대응이다. "과학이 병원체를 밝혀내고, 기술이 치료를 만들며, 제도와 사회가 대응 체계를 갖춘다"는 선순환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우리가 현재 마주한 아웃브레이크 또한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이해되고 대응되어야 한다.


끝나지 않는 전염병 아웃브레이크는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와 재구성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답을 알려주지 않지만,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백신을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빈곤과 불평등을 줄여 모두를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전염병을 막는 것을 넘어, 더 정의롭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전염병의 역사는 결국 인간 사회의 역사이며,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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