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 06
도로를 달리다 보면 수많은 표지판들을 마주치게 된다. 을지로 2가, 을지로 3가, 남산 1호 터널, 명동역과 같은 지명 표지판도 있고, 버스전용, 직진 후 좌회전, 좌회전 차량 직진 금지와 같은 교통 안내 표지판도 있다. 이 표지판들은 우리의 안전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표지판들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안내 기능을 넘어선 다른 메시지들을 발견하게 된다. "과속단속구간", "무인단속카메라 작동 중", "교통법규 위반 시 과태료 부과"와 같은 문구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표지판들은 운전자들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단속카메라가 작동하지 않거나 경찰이 숨어있지 않아도, 운전자들이 이런 표지판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고 교통법규를 준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감시의 여부가 아니라 '감시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다. 이것이 바로 현대 감시사회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 사회는 수많은 감시 기술에 둘러싸여 있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 전자결제정보, 휴대전화의 위치 정보 전송, CCTV와 같은 감시 체계는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아침에 교통카드로 지하철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밤에 온라인 쇼핑을 마치는 순간까지, 우리의 모든 행동은 어딘가에 기록되고 저장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감시를 강화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런 감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일까? 감시 기술은 위험을 줄이고, 안전을 증대시키며, 예방 활동을 강화하는 명분으로 사용된다. 범죄 예방, 테러 방지, 교통사고 감소, 개인 맞춤형 서비스 제공 등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정당한 목적들이다.
감시 기술의 원형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영국의 법학자이자 철학자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였다.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를 위한 행복뿐 아니라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소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벤담은 감시와 교육을 통해 소수를 다수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고자 하는 벤담의 눈에 들어온 영국 사회 문제가 있었다. 바로 감옥과 죄수였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죄수를 다수에 들어가지 못한 소수 격이었다. 18세기말 영국의 감옥 상황은 열악했다. 죄수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제대로 된 교화 없이 단순히 격리되어 있었고, 간수들의 부패와 횡포도 심각했다. 재범률은 높았고, 사회복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벤담은 이런 현실을 목격하며 공리주의 관점에서 근본적인 개혁 방안을 모색했다. 효율적인 감옥 운영뿐 아니라 죄수의 품행 인도 전략도 고민하면서, 파놉티콘을 설계했다.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
그가 고민한 핵심 문제는 이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수의 간수로 수백 명의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면서도 동시에 교화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이 바로 1791년 제안한 파놉티콘이라는 혁신적인 감옥 설계였다. 파놉티콘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본다(pan-opticon)’는 뜻이다. 원형 감옥의 중앙에 감시탑을 세우고, 죄수들이 각각 고립되어 수감되는 독방은 감시탑을 향해 방사형으로 배치된다.
이 설계의 핵심은 시야의 비대칭성에 있었다. 중앙의 감시탑에서는 모든 감방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탑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 감시탑 창문에 설치된 블라인드와 역광 효과로 인해 죄수들은 간수가 언제 어디를 보고 있는지, 심지어 간수가 그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죄수들은 항상 감시받고 있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하여 품행을 변화시킨다. 언제 관찰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이는 외부의 강제가 아닌 내적 자기 통제로 이어진다. 이렇게 죄수의 품행은 인도된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그의 철학인 공리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 즉 전체 사회의 행복과 복지에 미치는 영향으로 판단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범죄자에 대한 효율적 감시와 교화는 완전히 정당화된다. 소수 범죄자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다수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고, 범죄자 개인에게도 올바른 시민으로 거듭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벤담은 이처럼 감시와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파놉티콘의 원리를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공장, 구빈원 등 다양한 시설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을 효과적으로 교육하고, 환자를 체계적으로 치료하며,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도 같은 감시 원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벤담의 파놉티콘은 실제로는 건설되지 못했다. 영국 정부가 예산 문제와 기술적 어려움을 이유로 프로젝트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도 이미 일부 비판가들은 이런 전면적 감시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놉티콘의 아이디어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미국의 여러 주에서 파놉티콘 스타일의 감옥들이 건설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그 감시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20세기 후반 벤담의 파놉티콘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1975년 출간한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파놉티콘을 근대적 감시의 원리를 체계화한 상징적 건축물로 분석했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를 기점으로 서구 사회의 권력 작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중세와 근세의 군주권적 권력은 주로 장엄하고 잔혹한 공개 처형을 통해 작동했다.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했고, 이는 절대권력의 위엄을 과시하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효과를 노렸다.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이런 방식의 한계가 드러났다. 공개 처형은 때로 폭동을 불러일으켰고, 처형당하는 죄수가 순교자로 추앙받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대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단순한 위협과 처벌보다는 정교하고 지속적인 통제가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새로운 규율권력은 처벌보다는 예방에, 제거보다는 교정에, 공포보다는 규범화에 초점을 맞췄다. 목표는 범죄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개인의 행동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며,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푸코는 파놉티콘이 단순히 감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규율 권력의 구조를 보여주는 장치라고 분석했다. 그는 근대 사회가 규율을 통해 통치되는 규율 사회이며, 이러한 규율 권력은 병원, 공장, 학교, 막사 등 다양한 공간에 적용되었다고 설명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일렬로 앉혀 놓고 교사가 한눈에 관찰할 수 있도록 교실이 배치되었다. 출석부, 성적표, 생활기록부를 통해 개별 학생의 모든 활동이 기록되고 평가되었다. 체벌이나 퇴학 같은 강한 처벌보다는 반복적인 훈육을 통해 '모범 학생'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였다.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침대에 누워 의료진의 지속적인 관찰을 받도록 병실이 설계되었다. 체온, 혈압, 맥박 등 모든 생체 정보가 차트에 기록되었고, 의사들은 이 데이터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치료 방침을 결정했다. 군대에서는 병사들의 하루 일과가 분 단위로 세밀하게 통제되었다. 기상, 점호, 훈련, 식사, 취침 시간이 정확히 정해져 있었고, 모든 행동은 규정에 따라 이루어져야 했다. 이처럼 파놉티콘은 감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근대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통제 방식의 상징이 되었다.
푸코 이론의 핵심은 규율권력이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형태의 주체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파놉티콘에서 죄수는 단순히 감시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주체로 변화한다. 간수가 실제로 보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죄수는 항상 감시받고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외부의 감시는 내부의 자기 감시로 전환되고, 개인은 사회의 규범과 기대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규율하는 '정상적인 주체'가 된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푸코가 제시한 근대적 규율 사회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는 바로 산업 시대의 공장이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공장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장소가 아니라 노동자의 몸과 시간을 규율하는 거대한 기계가 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기계 기술자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Taylor)는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을 개발했다. 테일러는 노동자의 모든 동작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가장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찾아내려 했다. 그는 스톱워치를 들고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의 동작을 측정했다. 삽질을 할 때의 최적 삽 크기, 적재물의 무게, 휴식 시간 등을 과학적으로 계산하고,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표준 작업법'을 만들어 모든 노동자가 이를 따르도록 했다. 테일러주의의 핵심은 숙련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경험적 지식을 관리자가 독점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더 이상 '어떻게' 일할지 결정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정해진 방식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 되었다.
특히 컨베이어 벨트가 도입되면서 노동자에 대한 감시는 더욱 정교해졌다. 헨리 포드가 1913년 자동차 공장에 도입한 이 시스템은 감시와 통제의 혁신적 기술이었다.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의 분업화와 단순화를 가져왔고,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품처럼 정해진 속도에 맞춰 일해야 했다. 벨트의 속도가 작업 리듬을 결정했고, 뒤처지는 노동자는 즉시 확인되어 교체되거나 재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기계는 노동자를 '닦달하며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경영자는 공정 전체를 쉽게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개별 감독자가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기계 자체가 감시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숙련 노동자들이 담합하는 것을 방지하고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주의적 목적과 결부되어, 공장은 거대한 자동 기계처럼 작동하는 감시 시스템이 된 것이다.
포드 자동차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 따라 작업하는 노동자
1960년대 말부터는 전자정보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감시 체계가 확산되었다. 1967년 포토스캔사가 CCTV를 발명했고, 1970년대에는 인공위성을 통한 전 세계 감시가 가능해졌으며, 1990년대부터는 인터넷을 활용한 사이버 감시가 보편화되었다. 이로써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전자 파놉티콘(electronic panopticon), 즉 전자 정보를 이용한 새로운 감시 체계가 탄생했다.
전자 파놉티콘은 벤담의 파놉티콘과 공통적으로 불확실성을 이용한 규율과 통제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감시 방식, 공간, 피감시자의 상태, 그리고 역감시 가능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가장 주목할 점은 자발적 협조다. 과거에는 죄수가 강제로 감시당했다면, 현재는 사람들이 스스로 감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는 편리함을 위해 위치 정보를 공유하고, 소셜미디어에 일상을 공개하며, 온라인 쇼핑에서 취향을 드러낸다. 또 다른 특징은 역감시의 가능성이다. 디지털 기술은 아래에서 위로의 감시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시민이 권력자를, 소비자가 기업을, 네티즌이 유명인을 감시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전자 파놉티콘은 크게 슈퍼파놉티콘과 시놉티콘으로 나눌 수 있다. 슈퍼파놉티콘(Superpanopticon)은 감시를 당하는 사람이 감시에 필요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체제다. 강제적이지 않고 협력적인, 느슨한 통제 네트워크가 특징이다. 신용카드 사용, 소셜 미디어 활동, 스마트폰 이용 등이 그 예시다. 우리는 페이스북에 일상을 공유하고, 인스타그램에 위치를 태그 하며, 구글에서 관심사를 검색한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편의와 재미, 사회적 연결을 위해 스스로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정보들은 기업과 정부가 분석하여 맞춤형 광고, 정책 결정, 보안 관리 등에 활용한다. 시놉티콘(Synopticon)은 양방향 감시 체제로,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감시하는 파놉티콘과는 달리, 다수가 소수 권력자를 감시하는 형태도 가능하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와 '당신이 바로 감시하는 빅브라더다'라는 개념을 보여준다.
시놉티콘의 대표적인 사례는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이다. 1970년 칠레의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국민 복지를 위한 경제 관리 계획으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영국의 사이버네틱스 학자 스태퍼드 비어(Stafford Beer)가 설계한 이 시스템은 전국의 공장과 농장에서 생산량, 자원 사용량, 노동자 수 등의 실시간 경제 활동 정보를 수집하여 산티아고의 중앙 통제실로 전송하는 혁신적 실험이었다. 하지만 사이버신의 진정한 혁신은 기술이 아니라 민주적 참여 구조에 있었다. 이 시스템은 노동자와 지역 관리자가 생산 시스템, 경제 관리, 기술 설계에 참여하는 민주적이고 분권적인 방식이었다. 각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단말기를 통해 생산 목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지역별 경제 상황도 실시간으로 보고할 수 있었다.
사이버신 중앙 통제실은 마치 우주선 조종실 같은 모습으로 설계되었다. 7개의 회전의자가 원형으로 배치되고, 벽면의 대형 스크린들이 전국의 경제 지표를 실시간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려지는 결정들은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정보와 의견을 종합한 결과였다. 이는 통제와 감시가 특정 권력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참여하고 감시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아쉽게도 이 프로젝트는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중단되었지만, 기술을 통한 민주적 경제 운영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프로젝트 사이버신 중앙통제실
도로 위 표지판이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복잡한 감시 기술의 역사와 철학이 숨어 있다. 우리는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시작해 푸코가 말한 근대적 규율 사회, 그리고 전자 파놉티콘으로 진화해 온 감시 기술의 흐름을 따라왔다.
현대의 감시기술은 명백한 이중성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범죄 예방, 개인 맞춤형 서비스, 효율적 자원 배분 등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생활 침해, 개인 자유 제약, 사회적 통제 강화라는 부작용을 동반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이런 딜레마는 더욱 선명해졌다. 동선 추적, QR코드 출입 기록, 격리자 모니터링 등의 감시 기술이 방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개인 정보 노출과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현대인들이 감시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편의를 위해 기꺼이 위치 정보를 공유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받기 위해 개인 취향을 드러내며, 사회적 연결을 위해 일상을 공개한다. 이는 전통적인 강제적 감시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감시당한다는 불쾌감보다는 서비스를 받는다는 만족감이 크고, 통제당한다는 억압감보다는 관리받는다는 안정감이 앞선다. 하지만 이런 자발성이 과연 진정한 자유 의지에 기반한 것인지, 아니면 교묘한 유도에 의한 것인지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이제 우리 사회는 감시받는 동시에 감시하는 양면적인 존재가 되었다. 시민들이 정치인의 공약 이행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소비자들이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평가하며, 네티즌들이 유명인의 언행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현상들이 일상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양방향 감시가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집단 린치나 마녀사냥의 형태로 변질되기도 하고, 사생활 침해나 인격 모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감시의 민주화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현대 감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사회의 투명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완전한 프라이버시도, 완전한 투명성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개인의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공적 영역에서의 책임과 투명성도 확보되어야 한다. 정치인의 정책 결정 과정은 투명해야 하지만 개인적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하고, 기업의 제품 안전성 정보는 공개되어야 하지만 영업 기밀은 지켜져야 한다. 이런 균형점을 찾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와 민주적 토론이 필요하다. 어떤 영역에서는 투명성을, 어떤 영역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만들어가야 한다.
감시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안면인식 등의 기술들이 결합되면서 감시의 정밀도와 범위는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이런 기술적 변화에 맞춰 제도적, 법적, 윤리적 대응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 개인정보보호법의 강화, 알고리즘 투명성 확보, 감시 기술 사용에 대한 민주적 통제, 디지털 권리 보장 등이 필요한 조치들이다. 또한 시민들의 디지털 리터러시 향상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느냐의 문제다. 안전하고 효율적이지만 감시가 일상화된 사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다소 불편하고 위험하더라도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이는 단순한 이분법적 선택이 아니다. 두 가치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수의 전문가나 권력자가 아닌, 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민주적 토론과 결정이다.
제과공장에서 사용되는 인공지능 감시시스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감시 기술이 가져오는 편리함과 효율성,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생활 침해와 통제의 위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도로 위의 표지판이 우리를 목적지로 안전하게 안내하듯, 감시기술도 우리를 더 안전하고 편리한 사회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이 결코 자유를 잃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표지판은 길을 알려주지만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이 보여준 효율성의 유혹, 푸코가 경고한 규율권력의 위험, 그리고 현대 전자 파놉티콘이 제기하는 새로운 딜레마들을 통해 우리는 감시와 자유, 안전과 프라이버시, 효율성과 인간다움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긴장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감시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방향을 설정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도로표지판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표지판이 우리를 어디로 안내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여전히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