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 ] 02
오늘날 우리는 건강, 사회,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을 접한다. 하지만 그 주장이 모두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근거가 탄탄한 것도 있지만, 경험담이나 전통적 믿음에 기대는 주장도 많다. 그렇다면 무엇을 과학적 주장이라 하고, 무엇을 사이비과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구분을 위해 필요한 핵심 개념이 ‘과학적 합리성’이다. 이 글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의 개념과 조건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의학이 과연 과학인지, 아니면 사이비과학에 가까운지를 논의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한의학은 미묘한 위치에 있다. 한편으로는 국가적으로 공인된 의료 체계로서 의과대학과 나란히 한의과대학이 설립되어 있고, 건강보험 급여도 적용받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적 토대와 치료 효과에 대해 끊임없는 과학적 검증 요구를 받고 있다. 이런 현실은 우리에게 ‘과학’이라는 기준이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사회적 판단과 정책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실용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과학적 합리성의 개념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17세기 과학혁명 시대의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실험을 통해 낙하 법칙을 확인했다. 이는 경험적 관찰이 권위적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런 경험주의적 접근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고, 19세기에는 실험 방법론이 정교하게 발달했다.
20세기 들어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더욱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칼 포퍼(Karl Popper)는 "반증 가능성"을 과학의 핵심으로 제시했고,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의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합리성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과학적 합리성은 과학적 주장을 성립시키는 기준이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정량적 설명과 예측 :
단순히 "효과가 있다"가 아니라, 언제, 어느 정도, 어떤 확률로 나타나는지 수치로 보여야 한다. 예를 들어, 아스피린의 심장질환 예방 효과는 "심장마비 위험을 20% 감소시킨다"는 구체적 수치로 표현된다.
■ 경험적 근거 :
관찰과 실험, 기구 사용 등을 통해 확인 가능한 자료가 필요하다. 현미경으로 관찰된 세균, 엑스레이로 촬영된 골절, 혈액검사로 측정된 수치 등이다.
■ 실증적 검토 :
주장은 반드시 검증을 거쳐야 하며, 검증이 반복될수록 신뢰성이 높아진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임상시험 1상, 2상, 3상을 거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 논리적 일관성 :
과학적 주장은 모순되지 않는 논리 체계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뉴턴의 운동법칙이나 멘델의 유전법칙처럼 예외 없이 적용되는 규칙성이 있어야 한다.
즉, 과학적 합리성이란 누구나 동일한 조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이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나 특정 집단의 독점적 지식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과학적 합리성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학문적 엄밀성 때문만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적 근거는 정책 결정, 법적 판단, 소비자 선택의 기준이 된다. 코로나19 백신의 안전성과 효과가 임상시험 데이터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접종이 실시될 수 있었다. 만약 "전통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는 수준의 근거만 있었다면, 이런 대규모 공중보건 정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보면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 아스피린의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
- 대규모 임상시험을 통해 "저용량 아스피린(75-100mg) 일일 복용 시 심근경색 위험을 약 20% 감소시킨다"는 구체적 수치가 확인되었다.
- 이 효과는 전 세계 여러 연구팀이 반복 확인했으며, 작용 기전도 혈소판 응집 억제라는 생화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된다.
- 부작용(위장출혈 위험 증가)도 정량적으로 파악되어 있어, 의사들이 환자별로 위험-편익을 계산해 처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 페니실린의 항균 효과
- 알렉산더 플레밍의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되었지만,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작용 기전(세균의 세포벽 합성 억제)이 밝혀졌다.
- 최소억제농도(MIC) 같은 정량적 지표로 효과를 측정할 수 있고, 내성균의 출현 과정도 과학적으로 설명된다.
■ 혈액형 성격설
-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자유분방하다"는 주장이지만, 대규모 통계 연구에서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발견되지 않는다.
-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와 성격을 좌우하는 뇌 구조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생물학적 설명이 없다.
- 하지만 반증 증거가 제시되어도 신봉자들은 "예외적인 경우" 등으로 합리화한다.
■ 수맥 찾기
- 나뭇가지나 금속막대를 이용해 지하수맥을 찾는다는 주장이지만, 통제된 조건에서의 실험에서는 우연 수준을 넘는 정확도를 보이지 못한다.
- 지하수의 물리적 성질(전자기장 등)이 막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리학적 설명이 부족하다.
■ 동종요법
-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치료한다"는 원리와 "희석할수록 효과가 강해진다"는 주장은 현재의 화학과 생물학 지식과 모순된다.
- 분자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희석된 물이 어떻게 치료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 대규모 체계적 문헌고찰 연구들에서는 플라세보 효과를 넘는 치료 효과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주장이 명확히 과학 또는 사이비과학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의 일부 영역(정신분석 이론 등)이나 사회과학의 많은 이론들은 자연과학만큼 엄밀한 검증이 어렵다. 이런 "경계 지역"의 존재가야말로 과학적 판단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과학적 합리성을 지니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반증 가능성 (Falsifiability)
칼 포퍼가 제시한 이 기준에 따르면, 틀릴 수 있는 주장이어야 과학적이다. "모든 백조는 흰색이다"라는 주장은 검은 백조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반증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이다. 반면 "신은 존재한다"는 주장은 어떤 증거로도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다.
보편성 (Universality)
과학적 법칙은 시공간을 초월해 적용되어야 한다. 중력의 법칙은 지구에서나 달에서나 동일하게 작용한다. 만약 특정 문화권에서만 통용되는 지식이라면 그것의 과학적 지위는 의심스러워진다.
재현성 (Reproducibility)
같은 조건에서 실험을 반복하면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이는 과학적 지식의 신뢰성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다. 최근 심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재현성 위기"가 논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설명력과 예측력
과학 이론은 과거의 관찰을 설명할 뿐 아니라 미래의 현상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뉴턴의 역학은 행성의 궤도를 설명했을 뿐 아니라 미지의 행성(해왕성)의 존재를 예측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교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했다.
잠정성과 자기 수정성
과학적 지식은 절대불변이 아니라 새로운 증거에 따라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뉴턴 역학이 상대성이론으로 확장되고,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것이 그 예다. 이런 개방성이야말로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권위 의존 배제
과학에서는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말했느냐가 중요하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반대했지만, 실험 결과가 양자역학을 뒷받침하자 과학계는 아인슈타인이 아닌 증거를 선택했다.
한의학은 음양오행, 경락, 기(氣)와 같은 이론을 기반으로 하며, 치료법으로는 침술, 한약, 뜸, 부항 등이 있다. 약 3000년의 오랜 역사와 동아시아 문화적 배경을 갖춘 의료 체계다. 현재 한국에서는 한의학이 제도적으로 공인받고 있다. 한의과대학에서 6년간 체계적 교육을 받고,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한의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한의원과 한방병원에서 진료를 하며, 일부 치료는 건강보험 급여 대상이다. 이는 한의학이 단순한 민간요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의료 체계임을 의미한다.
■ 반증 가능성
침술의 일부 효과(진통, 오심 억제 등)는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으로 검증 가능하며, 실제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침술의 일부 적응증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의학의 핵심 개념인 기나 경락은 현재까지 객관적으로 측정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다. 경락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연구들도 재현성에 문제가 있거나 방법론적 한계를 갖고 있다.
■ 보편성
침술은 서양에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인정받고 있지만, 한의학의 체질론이나 변증론치(辨證論治)는 주로 동양 문화권에서만 통용된다. 서양인에게 한의학적 진단법을 적용했을 때 같은 효과를 보이는지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부족하다.
■ 재현성
침술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재현성이다. 연구자의 기술, 혈자리 선택, 자극 강도, 치료 횟수 등 변수가 많아 표준화가 어렵다. 같은 질환에 대해서도 한의사마다 다른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한약의 경우 동일한 처방명이라도 지역과 시기에 따라 구성 약재가 달라지기도 한다.
■ 설명력·예측력
한의학의 진단 체계(사진팔강, 장부변증 등)가 질병의 경과나 치료 반응을 얼마나 정확히 예측하는지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부족하다. 맥진이나 설진 같은 전통적 진단법의 정확도를 현대의학의 진단법과 비교한 연구에서는 일관된 결과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복잡한 내과 질환의 경우 한의학적 진단만으로는 정확한 예후 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 잠정성
한의학계에도 현대화와 과학화 노력이 있다. 한약의 유효성분을 분석하고, 작용기전을 밝히려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일부 한의과대학에서는 현대의학적 진단법을 도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양오행이나 경락 이론 같은 전통적 핵심 개념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는 제한적이다. 오히려 현대과학의 발견을 전통 이론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가 많다.
■ 권위 의존
한의학에서는 여전히 고전 문헌(황제내경, 상한론 등)의 권위가 절대적이다. "몇천 년 동안 검증된 지혜"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며, 임상 경험이 풍부한 원로 한의사의 견해가 과학적 증거보다 우선시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증거에 기반한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의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과학은 특정 방법론보다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증명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한약, 침술 등에 대해 과학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설계한 세포 실험, 시뮬레이션, 임상 연구 등이 진행되어 그 효능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한의학은 내적 일관성과 일반화 가능성이라는 과학의 두 가지 특성을 만족시키므로 과학적이다. 한의학은 공교육을 통해 전문가를 배출하며 일관된 학문 체계를 갖추고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를 보여 일반화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양의학과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식 형성 과정에 있다. 양의학이 연역적인 방법으로 발전해 온 반면, 한의학은 수많은 경험과 사례를 통해 발전한 귀납적인 학문이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한의학의 설명 방식이 현대인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며, 이것이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고 오해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한의학은 다른 학문보다 더 과학적으로 보이려 노력해 왔으며,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해외에서도 전통 의학으로 인정받는 등 과학적인 근거를 꾸준히 쌓아왔다.
귀납적 접근을 하는 한의학은 특정 진단명에 얽매이지 않고 환자의 다양한 증상에 접근할 수 있어 난치병이나 새로운 질병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미래에는 한의학이 의학을 넘어 건강한 사람부터 아픈 사람까지 모두 아우르는 생활 밀착형 학문이 될 것이다. 한의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실존하는 학문이므로 직접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적 합리성은 단순한 학문 기준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핵심 원리다. 한의학 논쟁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묻는 동시에, 전통과 현대 지식을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한의학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분법적 사고다. "한의학은 무조건 좋다" 또는 "한의학은 모두 가짜다"라는 극단적 입장보다는, 각각의 치료법과 이론을 개별적으로 평가하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침술의 진통 효과는 상당 정도 과학적으로 확인되었지만, 모든 한의학적 치료법이 같은 수준의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약 중에서도 일부는 유효성분과 작용기전이 밝혀졌지만, 많은 경우 아직 연구가 부족하다.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다.
과학적 사고는 편견 없는 열린 마음과 엄밀한 비판적 평가를 동시에 요구한다. 전통의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선입견을 갖고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공정하고 엄밀한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현대의약품들이 전통의학에서 출발했다. 디지탈리스(강심제), 모르핀(진통제), 키니네(말라리아 치료제)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이들이 인정받은 것은 전통적 사용 경험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검증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의 또 다른 특징은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직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의학의 많은 영역이 바로 이런 "아직 모르는" 범주에 속한다.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경우, 전통적으로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지만 과학적 검증에서는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 등이 있다. 이런 불확실성 앞에서 성급한 결론보다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나침반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과 과학적 엄밀성 사이의 균형을 찾고, 열린 마음과 비판적 사고를 조화시키며,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적 소양이다. 이러한 소양을 기르면서, 우리는 다양한 문제들—새로운 건강 정보, 과학 뉴스, 사회적 이슈 등—에 대해서도 합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