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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질문하는 자의 것이다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 14 닫는 글

by 사이에살다

아침 출근길에는 AI가 추천한 뉴스를 읽고, 점심시간에는 메타버스 공간에서 동료들과 회의를 한다. 저녁이 되면 AI와 대화하며 내일의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이미 과학기술이 직조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우리는 과학기술이라는 환경 속에 완전히 잠겨 있다.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하나의 질문을 품고 있었다. "과학기술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그러나 13개의 글을 거쳐 오면서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과학기술과 함께 어디로 가고 싶은가였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첫 장에서 우리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과학은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과학자의 호기심과 사회적 필요, 권력과 자본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존 자이먼의 삼각구도—과학자, 과학지식, 과학사회—는 과학이 단순히 실험실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임을 보여주었다. 마리 퀴리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발견도, 현대의 대형 입자가속기 실험도, 모두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가치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의학이 과학인가 아닌가를 묻는 두 번째 장은 더욱 첨예한 질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단순히 검증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과학으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였다.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기준 자체가 서구 근대의 산물이며, 다른 문화권의 지식 체계를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한의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권력, 문화의 다양성, 그리고 과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것이었다.


파놉티콘, 포스트휴먼 등 기술과 관련된 글에서 우리는 더욱 구체적인 현실과 마주했다. 기술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와 권력관계를 담는 그릇이었다. 뉴욕 롱아일랜드의 낮은 고가도로는 기술적 설계가 어떻게 사회적 차별을 구조화하는지 보여주었다. 기술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를 드러내는 거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예술과 기술이 하나였듯, 오늘날 우리에게도 기술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전염병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백신과 항생제를 가져왔지만, 진정한 변화는 사회 시스템의 재구성에서 왔다. 존 스노우(John Snow)의 역학조사는 단순히 콜레라균을 찾은 것이 아니라, 공중보건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상하수도 시스템, 검역제도, 보건의료 체계—이 모든 것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전염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COVID-19 팬데믹은 이 교훈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과학기술적 해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적 연대, 공정한 자원 배분, 국제 협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석탄 발전소를 태양광 패널로 바꾸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 전체를, 그리고 그 시스템을 떠받치는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 독일 펠트하임 마을의 사례는 이것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현실임을 보여주었다. 작은 공동체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협력이다.

감시 기술을 다룬 장에서 우리는 벤담의 파놉티콘부터 현대의 디지털 감시까지 추적했다. 도로표지판 하나에도 권력의 시선이 작동한다. 감시 기술은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제약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의 감시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편리함을 위해 기꺼이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받기 위해 우리의 행동 패턴을 공개한다. 슈퍼파놉티콘과 시놉티콘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감시는 더 이상 일방적 권력 행사가 아니라 복잡한 상호작용이 되었다.


가상현실 장에서 우리는 철학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했다. "이것은 진짜 현실인가?" 플라톤의 동굴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의 회의를 거쳐, 우리는 버클리와 굿먼의 답에 도달했다. 인간의 의식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다. VR 헤드셋 속의 경험도, 스마트폰 화면을 통한 소통도, 모두 우리의 뇌에게는 동등하게 '진짜'다. 중요한 것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윤리와 책임을 가질 것인가였다. 메타버스에서의 폭력도 실제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진지한 윤리적 공간이다.


과학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보았다. 갈릴레오의 달 스케치는 예술적 관찰력이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진 사례였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광학 이론을 캔버스에 옮겼다. 오늘날 생명공학이 예술의 재료가 되고, 알고리즘이 음악을 작곡하며, AI가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 창작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더욱 절실해졌다. 기술이 예술을 만들 수 있다면, 예술의 본질은 결과물이 아니라 창조 과정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의 감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보그 장에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다. 우리는 이미 기술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안경을 쓰고, 스마트폰을 들고, 인공장기를 이식받은 순간,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다. 도나 해러웨이의 선언처럼, 이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가능성이다. 고정된 정체성, 생물학적 본질주의, 이분법적 사고로부터의 해방. 사이보그로서 우리는 더 유연하고, 더 다양하며, 더 포용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기술을 통해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이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AGI의 출현이 임박한 지금,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술이 인간을 지배할 것인가, 인간이 기술을 통제할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을 통한 인간 향상을 꿈꾸지만,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은 묻는다. 누가 향상되고, 누가 배제되는가? 향상 기술이 새로운 계급을 만들지는 않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과제다. 그 답은 기술 전문가의 손에만 있지 않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적 토론을 통해 찾아야 한다.


AI가 시민을 부를 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AGI의 도래가 임박한 지금, 이 질문은 더욱 시급해졌다. 디지털시민성은 단순히 기술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갈 미래 사회의 가치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태도다. 비판적 사고, 윤리적 행동, 참여적 거버넌스, 디지털 포용성—이 모든 것이 21세기 시민의 필수 역량이다. UNESCO의 AI 윤리 권고안이나 한국의 AI 윤리기준은 좋은 출발점이지만, 진정한 변화는 이러한 원칙들이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기술과 종교가 얽히는 지점에서 우리는 발견했다. 둘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대화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과학기술이 '어떻게'를 다룬다면, 종교는 '왜'와 '무엇을 위해'를 묻는다. 이 질문들이 만날 때, 우리는 좋은 사회를 향한 길을 찾을 수 있다. 종교가 제공하는 희망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변혁의 에너지다. 과학기술시민성을 가진 호모 폴리티쿠스를 키워내는 것, 그것이 21세기 종교의 역할일 수 있다.


에세이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을 마치며 나는 다시 질문한다.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솔직히 나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2020년에 누가 2023년에 ChatGPT가 등장하여 세상을 바꿀 줄 알았겠는가. 2019년에 누가 2020년에 전 세계가 팬데믹으로 멈출 줄 예상했겠는가.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미래는 우리가 오늘 내리는 선택들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 가능성을 어떻게 실현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를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미래는 질문하는 자의 것이다. "이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혜택을 받고, 누가 배제되는가?" "우리는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 "효율성과 인간다움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사람들이 미래를 만들어간다.


이 에세이가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것이 바로 이 글의 목적이었다. 질문은 사유의 시작이고, 대화의 초대이며, 변화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광장에서 그랬듯, 질문은 우리를 깨어있게 만든다. 당신이 이 글들을 읽으며 품게 된 질문들이, 당신의 일상에서, 당신의 공동체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길 바란다. 과학기술의 미래는 실험실이나 연구소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작은 선택과 실천 속에서 만들어진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미래는 상상하는 자, 질문하는 자,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자의 것이다. 이제 당신의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할 시간이다. 그리고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갈 첫걸음을 내딛을 시간이다. 미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함께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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