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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지만 괜찮아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 10

by 사이에살다

우리는 기술을 신체에 삽입하거나, 기술을 몸의 일부로 삼았거나, 아니면 기술과 감각적으로 연결된 존재다. 안경을 쓰고, 스마트폰을 들고,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워치를 차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다. 인공심장을 이식받은 환자는 물론이고, 보청기를 사용하는 노인도, 인슐린 펌프에 의존하는 당뇨 환자도, GPS 없이는 길을 찾지 못하는 운전자도 모두 사이보그다.




1. 우리는 사이보그다


이 존재양식은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다. 우리는 완벽한 기계도, 순수한 생명체도 아니다. 때로는 기술이 고장 나고, 배터리가 방전되고, 네트워크가 끊긴다. 우리의 사이보그적 존재는 취약하고 의존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기술과의 결합이 인간성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술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게 해 준다. 시각장애인이 인공망막을 통해 세상을 보고, 청각장애인이 인공달팽이관을 통해 소리를 듣고, 마비 환자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의사를 표현할 때, 기술은 인간성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한다.


물론 경계해야 할 지점들도 있다. 기술이 감시와 통제의 도구가 될 수 있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으며, 새로운 형태의 차별을 낳을 수 있다. 누가 어떤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가? 기술이 만드는 데이터는 누가 소유하고 관리하는가? 기술적 증강이 새로운 '정상성'의 기준이 되어 그것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배제하지는 않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이 기술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기술을 둘러싼 권력관계와 사회구조다. 기술을 누구의 이익을 위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해러웨이가 강조했듯이, 사이보그적 미래는 자동으로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기술이 우리 신체를 확장하고, 과학이 우리 정체성을 재구성하며, 예술이 그 변화를 감각적으로 제시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이 기계와 융합된 존재 양태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새로운 윤리·감수성·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사이보그로서의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의 일부다. 우리의 취약함은 상호의존을 통해 보완되고, 우리의 차이는 다양성의 원천이 된다.


사이보그임을 두려워하지 말라. 완벽함을 추구하지도 말라. 우리는 불완전하고, 의존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자 동시에 가능성이다. 기술과 생명, 신체와 기계, 감각과 제어가 뒤엉킨 이 시대에 우리 모두는 하나의 결합체이자 하나의 실험이며 하나의 가능성이다.


괜찮다,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다. 그리고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더 풍요롭고, 더 다양하며, 더 연결된 존재가 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유무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기술을 통해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서, 자연과 인공의 교차점에서,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의 서사를 쓰고 있다. 이 서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 결말은 열려 있다. 우리 모두가 그 이야기의 공동 저자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아니, 사이보그이기 때문에 괜찮아. 우리는 더 이상 고정된 본질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며, 재창조되는 존재다. 그 불안정성과 유동성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기술은 우리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되고자 하는 존재가 될 수 있게 하는 도구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자. "우리는 여전히 인간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라고. 사이보그로서의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갖는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험이다. 우리의 심박수와 수면 패턴을 기록했다. 출근길에는 무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내비게이션 앱이 안내하는 최적의 경로를 따라 이동한다. 우리는 이미 기술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여전히 '순수한 인간'인가, 아니면 이미 '사이보그'가 된 것은 아닐까?


두개골 안테나를 장착하여 사이보그가 된 닐 하비슨



2. 사이보그란 무엇인가?


사이보그 개념의 이해


'사이보그(cyborg)'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이들이 SF 영화 속 금속 골격을 가진 존재나, 기계 팔을 장착한 미래 전사를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사이보그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또 우리의 현실과 가깝다.


좁은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인간의 신체 일부가 기계나 전자장치로 대체되거나 보완된 존재를 뜻한다. 인공심장을 이식받은 환자, 로봇 보조 팔을 장착한 사람, 뇌에 신경이식 칩을 삽입한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전통적 의미의 인간(Human)과 기계(Machine)가 물리적으로 결합된 존재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훨씬 더 포괄적이다. 이른바 '범사이보그(generalised cyborg)' 개념은 기술적 기계장치와 생명체가 뒤엉켜,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흐려지는 모든 존재양식을 포괄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가는 현대인도, 보청기를 착용한 노인도, 안경을 쓴 학생도 모두 일종의 사이보그다. 기술이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고, 인지 능력을 보완하며, 신체 기능을 증강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이보그는 더 이상 극소수의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생명체 연결망 속에서 일반화된 존재양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이 기술을 단순히 도구로 삼는 단계를 넘어서, 기술이 인간을 구성하고 인간의 감각·인식·신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는 이미 기술 없이는 온전히 기능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는 곧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범사이보그화


사이보그를 가능하게 한 기술들


사이보그라는 존재가 현실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가지 중요한 기술적 흐름이 있다. 바로 로봇공학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다.


로봇공학은 기계장치를 통해 인간의 신체 기능 또는 작업 기능을 보완하거나 대체하기 위해 발전해 온 기술이다. 초기의 단순한 산업용 로봇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정밀한 수술을 수행하는 의료 로봇, 마비 환자의 보행을 돕는 착용형 로봇(exoskeleton), 노약자의 일상생활을 보조하는 케어 로봇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이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을 반영한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더 오래, 더 정밀하게—로봇공학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의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한편 사이버네틱스는 미국의 수학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가 1940년대에 제창한 학문으로, 기계·생명체·사회가 정보와 제어, 통신 과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사이버네틱스의 핵심 개념은 '피드백 제어(feedback control)' 시스템이다. 즉, 인간과 기계가 상호작용하며 정보를 주고받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서로의 행동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기계 결합이 단순한 도구적 부속 관계가 아니라, 제어와 정보의 순환 회로로 연결된 하나의 통합 시스템임을 보여준다.


로봇공학의 진보가 물리적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면, 사이버네틱스는 정보적·인지적 결합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 신체는 기술적으로 확장되고 보완되며, 우리는 비로소 '사이보그'라는 새로운 존재양식을 마주하게 된다.


사이보그의 등장과 발전


사이보그 연구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1960년대 초, NASA(미국 항공우주국)는 우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삼투압펌프 유지 쥐(osmotic pump rat)'를 이용한 초기 사이보그 실험을 진행했다. 이는 생명체에 기계장치를 부착하여 생명 시스템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윤리적 논란과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며 결국 중단되었다. 생명을 기계화한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후 사이보그 개념은 과학 실험실을 벗어나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SF 영화와 드라마, 소설 속에서 사이보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존재로 그려졌다. 전신이 기계화된 전사, 인공지능과 접속된 신체,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진 미래 사회—이러한 이미지들은 대중에게 사이보그라는 개념을 각인시켰다. 영화 <로보캅>, <공각기동대>, <터미네이터> 등은 사이보그가 단순한 과학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과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이보그는 더 이상 상상 속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인공 관절, 인공심장, 인공달팽이관, 인공망막 같은 의료 기술이 실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바이오칩, 웨어러블 생체센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같은 기술들이 임상 단계를 넘어 일상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 속에서, 사이보그는 인간이 더 이상 자연적 신체만으로 정의되지 않는 시대를 상징하게 되었다.


신체에 기술이 삽입되거나, 신체가 기술적 네트워크와 연결될 때, 우리는 무엇이라 불려야 하는가? 여전히 인간인가, 아니면 새로운 무엇인가? 사이보그는 바로 이러한 질문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다. 기계기술과 생명체가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난 '기술적 생명체'이자, 인간이 갖는 신체·정체성·권력의 경계를 다시 묻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삼투압 펌프를 장착한 사이보그 쥐


나사의 사이보그연구계획서



2.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


도나 해러웨이와 과학기술 연구


사이보그 개념을 철학적·정치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이 있다. 바로 미국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과학기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다. 생물학과 동물학을 전공한 그녀는 과학기술문화 연구(Science & Technology Studies, STS) 분야에서 독창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해러웨이의 학문적 여정은 독특하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과학자로 출발했지만, 그녀는 과학이 결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과학기술은 항상 특정한 권력관계와 사회구조 속에서 발전하며, 성별·인종·계급 같은 요소들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녀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술과 생명, 정치와 성별, 인간과 동물, 자연과 기계의 경계를 문제화하며, 현대 기술사회 속 존재양식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전개해 왔다.


그녀의 수많은 저작 중에서도 1985년에 발표된 논문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사이보그 선언: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페미니즘)는 사이보그 개념을 페미니즘, 사회주의, 과학기술 담론과 연계하여 제시한 획기적인 이론 텍스트로 평가받는다. 이 논문은 단순히 학술적 논의를 넘어, 하나의 선언문이자 정치적 manifesto로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의 선언적 시작


해러웨이는 이 논문을 강렬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나는 여신(goddess)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기를 택한다." 이 문장은 당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추구하던 '여성의 자연 회귀' 또는 '여성 본질주의'에 대한 명확한 거부 선언이었다.


1980년대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여성을 자연, 대지, 모성과 연결하며, 남성이 지배하는 기술문명에 대항하여 여성의 자연적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이러한 본질주의가 오히려 여성을 생물학적 운명에 가두는 함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가 제시한 대안이 바로 '사이보그'였다.


사이보그는 자연/문화, 남성/여성, 인간/기계 같은 전통적 이원론(binary opposition)을 파괴하는 존재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이 서구 사상의 근간을 이루면서 동시에 억압의 도구로 작용해 왔다고 비판했다. 자연은 문화에 종속되고,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며, 신체는 정신에 종속되는 위계구조 말이다.


사이보그는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는 잠재력을 가진 존재다. "인간과 기계, 유기체와 기술, 생물과 인공물이 결합된 존재"로서 사이보그는 명확한 경계 설정을 거부한다. 해러웨이는 이를 통해 억압적 질서—성별, 인종, 계급, 생명공학 권력—에 저항하는 메타포적 존재를 제안했다. 사이보그는 단순한 과학기술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해방적인 상상력의 도구인 것이다.



《사이보그 선언》에 담긴 철학 : 이원론을 거부하는 사이보그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경계의 해체'다. 그녀는 인간/기계, 자연/문화, 유기체/인공물과 같은 이분법적 구분이 기술사회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서구 철학은 명확한 범주와 경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해 왔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고, 생명체는 기계와 다르며, 자연은 문화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질서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위계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인간'이라는 범주에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가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차별과 폭력을 낳았다.


사이보그는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린다. 인공심장을 가진 사람은 완전한 인간인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기계인가? 인공지능과 소통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가진 이는 어디에 속하는가? 유전자를 편집한 생명체는 자연인가 인공인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전통적 범주는 무력해진다.


해러웨이는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가능성이라고 본다. 사이보그는 전통적 정체성과 위계구조를 재구성한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 과학자와 도구의 경계가 흐려질 때, 우리는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이보그는 더 이상 '완성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하게 연결된 존재',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존재'다. 이는 정체성의 유연성과 다층성을 보여주며, 우리가 기술-생명체-사회 네트워크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새롭게 사유하게 한다. 우리는 완결된 개체가 아니라, 무수한 관계와 연결의 매듭이다.


《사이보그 선언》에 담긴 철학 : 여성/약자 해방의 메타포로서의 사이보그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개념을 제시한 것은 단순히 철학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진짜 목표는 여성, 인종소수자, 장애인 등 전통적 위계체계에서 억압되던 존재들의 해방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전통적 페미니즘의 일부 경향은 여성을 '자연'과 동일시하며,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와 '기술'에 대항하는 전략을 취했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이것이 여성을 다시 '자연적 역할'에 가두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신 그녀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통적 성 역할과 신체 규범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사이보그는 "기존의 남성중심적, 인간중심적, 자연중심적 담론을 넘어설 수 있는" 상징적 존재다. 예를 들어, 재생산 기술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몸에 가해지던 통제를 문제화할 수 있다. 장애 보조 기술은 '정상' 신체라는 규범 자체를 의문시한다. 사이보그적 시각에서 보면, 모든 신체는 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며, 어떤 신체가 '자연적'이고 '정상적'인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즉, 사이보그는 단지 기술적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존재다. 그것은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된 신체(몸)를 재구성하고, 기술을 통해 재정의된 존재다. 여성의 신체, 장애인의 신체, 노인의 신체, 트랜스젠더의 신체—이 모든 '비규범적' 신체들은 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할 수 있다.


해러웨이는 약자의 신체와 정체성을 "기계/생명/사회 복합체"로서 다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억압은 '자연적' 신체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신체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된다. 사이보그적 상상력은 이러한 규범을 해체하고, 다양한 신체-기술 결합체를 긍정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사이보그 선언》에 담긴 철학 : 몸과 기술의 결합, 그리고 책임의 윤리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책임'의 문제다. 그녀는 기술과 몸의 결합이 단지 기술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책임과 윤리의 영역임을 강조한다.


사이보그 존재는 단순히 신체를 기계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신체를 통해 행하는 변화와 그 사회적 결과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예를 들어, 유전자 편집 기술은 특정 유전 질환을 예방할 수 있지만, 동시에 '바람직한 유전자'와 '바람직하지 않은 유전자'를 구분하는 새로운 우생학을 낳을 위험이 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는 마비 환자의 의사소통을 돕지만, 동시에 생각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기술-생명체 결합이 야기하는 생명윤리, 프라이버시, 권력관계, 인간정체성의 변화 등을 개인과 사회가 함께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 해러웨이의 메시지다. 우리는 기술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주체로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해러웨이는 "위치성(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모든 지식과 기술은 특정한 위치, 즉 특정한 사회적·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생산된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개발되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사이보그적 미래는 자동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3. 마치며 : 사이보그의 철학적 확장

- 인간·기계·생명 사이에서 다시 쓰는 존재의 서사


사이보그를 단순히 로봇-기술적 결합체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개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놓치게 된다. 사이보그는 기술적 구성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재론적·인식론적·정치적 질문이다.


로봇기술과 사이버네틱스 기술의 결합만으로 사이보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구성만으로는 그 존재양식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사이보그 존재는 생태환경,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맥락 속에서 비로소 그 철학적 의미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기술이 우리의 신체를 확장하고 보완할 때, 그 신체가 속한 생태계(환경)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신체를 둘러싼 권력관계(정치경제)는 어떻게 재편되는가? 신체를 둘러싼 문화적 의미(사회문화)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 모든 것이 함께 변화해야만 사이보그라는 존재가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공장기를 이식받은 환자를 생각해 보자. 그는 단지 기능을 보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치료된 신체는 기술과 생명의 경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다시 묻는 존재가 된다. 그의 신체는 이제 의료 시스템, 보험 제도, 제약 산업, 생명윤리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기술적 네트워크의 한 노드(node)다.


웨어러블 생체센서를 통해 건강 데이터를 수집하는 사용자는 어떤가? 그의 신체 정보는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되고, 알고리즘에 의해 분석되며, 보험회사와 의료기관에 의해 활용된다. 증강현실 기기를 착용한 사용자는 자신의 신체와 환경을 기술망의 일부로 확장한 존재가 된다. 이는 신체가 분리된 자연물이 아니라 네트워크 속 존재자(entity)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일상으로 자리 잡은 스마트폰과 인터넷, 생체 센서들은 우리 삶을 숨 쉬듯이 기술-매개화된 상태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하루 종일 디지털 기기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며,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소비한다. 인간은 더 이상 단독 존재가 아니라 기술적 환경과 감각적으로, 인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결합된 존재가 되었다. 이른바 '범사이보그' 시대다.


따라서 사이보그 철학은 기계화된 신체의 문제를 넘어서, 생명, 정체성, 권력, 환경, 윤리가 교차하는 복합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사이보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인공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기술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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