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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종교가 얽히다

[과학기술의 미래와 상상] 13

by 사이에살다

과학과 종교는 오랫동안 대립과 갈등의 이미지로 기억되어 왔다. 1633년 갈릴레오 재판, 19세기 다윈의 진화론 논쟁, 20세기 스콥스재판(Scopes trial)—이러한 상징적 사건들은 과학과 종교가 양립할 수 없다는 '갈등 논제(conflict thesis)'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단순히 진리의 충돌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인식 체계가 인간 존재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두고 벌인 역사적 대화였다.


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이언 바버(Ian G. Barbour, 1923-2013)는 그의 저서 《과학과 종교》(Religion and Science, 1997)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이 분류는 현재까지도 과학-종교 담론의 기본 틀로 활용된다.


첫째, 갈등(conflict) 관계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유물론자들과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모두 이 입장에 속한다. 리처드 도킨스와 창조과학회는 입장은 정반대지만, 과학과 종교가 동일한 영역에서 경쟁한다고 보는 점에서 같다. 둘째, 독립(independence) 관계에서 과학은 '어떻게(how)'를, 종교는 '왜(why)'를 다루기에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비중첩 교도권(NOMA, Non-Overlapping Magisteria)' 개념이 대표적이다. 과학은 사실의 영역, 종교는 가치의 영역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화(dialogue) 관계에서는 양자가 언어와 논리의 다름을 인정하되 공통 관심사를 공유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주의 기원, 생명의 본질, 인간 의식 등의 주제에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지만,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넷째, 통합(integration) 관계는 과학적 탐구와 신앙적 성찰이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단계다. 자연신학, 자연의 신학, 과정 철학 등이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사회에서는 이 네 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기술이 인간의 삶과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지금, 종교 또한 과학기술의 윤리적 방향을 묻는 존재로 새롭게 소환된다.


과학기술과 종교는 갈등하는가? 대화하는가?




1. 가치 배제의 이상: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이다


가치란 무엇인가?


'가치(value)'란 인간이 사물이나 행위에 부여하는 중요성 또는 바람직함의 정도를 말한다. 과학철학자 케빈 엘리엇은 "가치는 추구할 만한 그 무엇(something desirable)"이라 정의한다. 윤리가 옳고 그름의 판단에 초점을 둔다면, 가치는 인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준다. 기술철학자 손화철은 "윤리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노력과 연결되는 반면, 가치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중요성의 정도와 연결된다. 윤리와 가치는 규범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한다.


과학과 기술의 가치중립성


근대 이후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분리'를 이상으로 삼았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사실에 대한 어떤 기술도 우리가 왜 도덕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가를 말해주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조지 무어(G. E. Moore)는 자연에서 도덕적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오류라며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지적했다.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J. Rickert)는 "자연과학은 보편적인 것을, 역사학과 문화과학은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것을 파악한다."며 영역을 구분했다.


실증주의 철학자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은 "자연과학 진술에서 형이상학적 진술은 무의미하다"라고 주장했으며, 제리 포도(Jerry A. Fodor)는 "과학은 사실에 대한 것이지 규범에 대한 것은 아니다. 과학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말해주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과학은 객관적 사실 탐구의 영역, 윤리나 가치 판단은 철학과 종교의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기술 역시 오랫동안 '도구적 중립성'의 신화를 지녀왔다. 총은 기능적으로 좋은 총과 나쁜 총이 있지만, 도구로서의 총 자체는 중립적이어서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도구의 사용과 사용 목적에 대한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논제



2. 과학과 기술, 그리고 가치의 얽힘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제임스 라디맨(James Ladyman)은 과학의 내재적(인식적) 가치로 검증 가능성, 단순성, 설명력, 예측성, 일관성, 지식 증진, 독창성, 재연 가능성, 통계 분석 등을 들었다. 이러한 가치들은 과학의 객관성을 지탱하면서 엄격한 방법론의 토대를 제공한다. 동시에 '좋은 과학'을 규정하는 판단 기준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학은 내재적 가치뿐 아니라 외적(맥락적) 가치도 지닌다. 과학자 공동체가 놓인 맥락에 따라, 혹은 과학자의 주관적 선호에 따라 공유하거나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다양하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은 과학자 공동체의 '패러다임' 속에서 작동한다고 했다. 과학자들은 동일한 인식적 가치를 공유하지만, 사회적·정치적 맥락에 따라 다른 패러다임을 선택할 수 있다.


라부아지에와 프리스틀리의 산소 논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영국인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와 프랑스인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는 물질 연소와 관련된 공기를 찾고 있었다. 연소 실험을 통해 특정 공기를 발견한 프리스틀리는 그 공기에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 불렀다. 라부아지에는 이 공기에 대해 후속 실험을 한 후에 '산소(oxygén)'라고 명명했다. 동일한 공기에 왜 그는 다른 이름을 붙였을까? 프리스틀리는 연금술 전통의 플로지스톤 이론을 지지하며 실험과 관찰 중심의 경험 연구방법을 선호했다. 정성적 접근이 우선이었다. 반면 라부아지에는 연금술에서 벗어난 새로운 화학 전통을 세우고자 했으며, 수학적 계산과 정량적 분석을 강조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개인적 선호가 아니라, 영국 왕립협회(버밍엄 루나협회)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연구 전통 차이이기도 했다. 나아가 산업혁명 이후 부상하는 영국과 절대왕정 붕괴 후 무력한 프랑스라는 국제 정치적 맥락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과학은 사실 탐구이면서도 사회적·문화적 가치에 자유롭지 못한 실천이다. 케빈 엘리엇은 과학과 가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무엇을 달성하고자 하는가?", "불확실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좋은 증거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에 가치 판단이 개입한다.


기술은 가치중립적인가?


기술은 인간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설계된 실천적 행위다. 그러기에 기술은 그 설계와 적용 과정에서 특정 가치를 반영한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가치와 권력관계를 담는 그릇이다. 이 점에서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Langdon Winner)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기술은 정치적이다"라고 단언했다.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남쪽에는 뉴욕 최고의 휴양지라고 하는 존스비치(Jones Beach) 해변공원이 있다. 1920년대 이 공원으로 가는 진입도로 위로 고가도로가 설계되었다. 이 고가도로는 높이가 낮아서 버스는 진입도로를 달릴 수 없었다. 당시 흑인이나 빈민들은 주로 대중교통인 버스를 이용했으며, 롱아일랜드 부촌에서 가사도우미나 정원사로 일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는 한 그들은 결코 해변공원에 갈 수 없었다. 자가용을 소유한 중산층 백인들만이 공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래서 기술은 정치적이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설계와 적용 과정에서 특정한 사회적 가치와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많은 도시들이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넓은 도로, 대형 주차장, 쇼핑몰 중심의 상업 지구 등은 자동차 이용자에게는 편리하지만, 보행자, 자전거 이용자, 대중교통 이용자에게는 불편하다. 이는 단순히 교통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생활 방식과 가치를 우선시하느냐의 문제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같은 디지털 플랫폼들은 중립적인 기술 서비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권력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알고리즘이 정보의 가시성을 결정하고,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통해 사용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조작한다.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은 어떤 정보가 먼저 노출되고 어떤 정보가 묻히는지를 결정한다. 페이스북의 뉴스피드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보는 뉴스와 의견을 필터링한다. 이는 객관적인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설계 선택이다.


조지 바살라(George Basalla)는 『기술의 진화』(the Evolution of Technology)에서 기술 설계나 혁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심리적 요인, 지적 요인, 사회문화적 요인, 경제적 요인, 군사적 요인 등을 들었다. 이 모든 요인이 기술에 영향을 주는 만큼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체코 프라하의 천문시계(1410)와 조선 세종 시대의 자동 물시계 흠경각옥루(1438)를 비교해 보자. 두 시계 모두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천문시계다. 그러나 프라하 시계가 중세 기독교 신학의 우주질서를 드러내며 그 질서를 따라 삶을 살라는 계몽적 장치였다면, 흠경각옥루는 하늘의 뜻을 파악하여 백성의 생활을 살피고자 하는 세종의 통치 사상이 드러난 행정 기술이었다. 두 시계 모두 천문시계이지만 문화와 가치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설계를 보인다.


기술은 단순히 과학적 필요나 기술적 논리에 의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필요와 권력구조, 경제적 이해에 의해 선택되고 발전한다.


뉴욕주 롱아일랜드 존스비치 해변공원 고가도로



프라하 천문시계(좌)와 복원된 흠경각옥루(우)



3. 호모 폴리티쿠스: 정치하는 인간으로서의 시민


가치포괄적 과학 그리고 가치의 각축장인 기술


과학철학자 래리 라우던(Larry Laudan)이 말한 바처럼, 오늘날 과학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여 다양한 미래 현상들을 예측하고 사회에 적용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는 더 이상 과학이 외적인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권, 환경, 건강, 지속가능성 같은 가치들이 과학의 목표로 편입되고 있다. 전염병 대응이나 인공지능 연구 윤리에서 보듯, 과학은 다양한 가치가 비판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복합적 공간이 되었다.


기술은 사용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제작되기에, 가치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 기술에서는 어떤 가치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에 대한 각축이 일어난다. 편리성·효율성·경제성뿐 아니라 안전·민주성·지속가능성·환경친화성 등 다양한 가치가 경쟁하는 장이다. 핵발전, 자율주행차, 유전자 편집 등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의 문제와 마주한다. 그러기에 기술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에 시민들이 반응하여 새로운 가치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 기술은 시민이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 시민의 참여 없이는 지속가능한 기술 발전이 불가능하다.


호모 폴리티쿠스와 과학기술시민성


아리스토텔레스의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는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규정했다. 오늘날 이 개념은 과학기술사회에서 시민의 역할로 확장된다. 과학기술은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현대인들은 인간의 미래에 대해 숙고하며 과학기술 관련 의사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기에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시민성(Scientific and Technological Citizenship)을 함양해야 한다.


과학기술시민성은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중시되는 현대 과학기술사회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시민성이다. 과학기술사회의 시민은 과학기술 관련 의사 결정에 내실 있게 참여하며, 이를 위해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을 학습하고 성찰해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과학기술 문제에 대해 실천적으로 관여하며 책임을 지는 시민성이 바로 과학기술시민성이다.




4. 호모 폴리티쿠스를 낳는 종교


종교적 희망과 호모 폴리티쿠스


종교는 과학기술시민성을 위한 사회적·윤리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다. 종교가 제공하는 희망은 초월적 세계로의 도피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정의와 회복을 향한 실천적 에너지다. 종교가 선사하는 희망은 죽음 너머의 영원이 아니라 종교적 구원이 머무는 이 땅의 미래를 인식하게 한다. 독일의 기독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희망의 신학》(1964)에서 "희망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힘"이라 했다. 그러기에 종교적 희망은 기존 현실을 향해 질문을 하며 실천적 저항과 창조적 변혁의 운동을 이끌어, 오고 있는 미래를 위해 봉사한다.


이러한 종교의 희망은 과학기술시민성을 지닌 호모 폴리티쿠스를 낳아 세상으로 보낸다. 실천적 저항과 창조적 변혁 운동 속에서 호모 폴리티쿠스는 좋은 사회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을 품으며 시대에 따라 과학과 기술이 지녀야 할 가치들을 논한다. 과학기술과 현대 사회를 성찰하는 질문들을 제기하며, 과학기술이 가치와 방향을 탐색하고 재설정하게 한다. 이렇듯 종교는 과학기술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성찰을 이끌며, 인간과 사회, 더 나아가 생태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촉구한다.


과학기술과의 대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


오늘날 종교는 과학기술과의 '화해'를 넘어, 새로운 협력의 틀을 모색해야 한다. 종교의 역할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과학기술을 통해 창조를 이해하기다. 현대 과학은 종교가 해석해 온 창조 개념을 확장시킨다. 빅뱅 우주론, 진화생물학, 양자물리학은 창조를 지속적 과정으로 이해하게 한다. 종교는 이를 통해 신의 창조를 '살아 있는 현재의 과정'으로 새롭게 묘사할 수 있다. 정적인 완성이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 신이 세계와 함께 진화한다는 관점이 가능해진다.


둘째, 신앙 유산 속 사회적이며 공적인 가치 발굴이다. 종교 전통에는 연대, 생명 존중, 정의, 절제, 겸손, 감사와 같은 공공의 가치가 담겨 있다. 이는 기술 발전이 초래한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 위기에 대한 윤리적 지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2015)는 생태 위기에 대한 종교적 응답이자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셋째, 문명 전환과 대안사회에 대한 담론 형성이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윤리, 생명공학 문제는 과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종교는 문명 전환을 위한 상상력을 제공하며, 미래를 위해 현재 과학기술사회가 지향해야 할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태중심주의로, 성장 중심에서 지속가능성 중심으로, 경쟁에서 연대로의 전환을 촉구할 수 있다.


넷째, 사회적 자본 역할과 과학기술 거버넌스 형성 및 시민참여 독려다. 종교는 사회적 자본으로서 시민 참여를 촉진할 수 있다. 교회, 사찰, 성당 등 종교 공동체는 사회 구성원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네트워크이자 사회적 공간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과학기술에 대한 공론장을 형성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아 정책 결정에 반영할 수 있다. 사회공동체의 신뢰와 연대의 문화는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민주성을 강화한다.





5. 맺음말: 과학기술과 종교의 얽힘을 재구성하다


과학기술과 종교는 더 이상 갈등의 관계로만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둘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 얽힘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다.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기에 종교는 가치 판단에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종교는 단순히 과학기술을 반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대화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이 제기하는 근본적 질문에 대해 종교는 오랜 지혜와 성찰을 제공할 수 있다. 동시에 종교도 과학기술로부터 배워야 한다. 과학적 발견은 종교의 교리를 재해석하게 만들고, 기술의 발전은 종교가 다루어야 할 새로운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 기후변화—이러한 문제들 앞에서 종교는 낡은 답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찰과 실천을 제시해야 한다.


과학기술과 종교가 얽히는 방식은 다양하다. 때로는 긴장과 갈등으로, 때로는 무관심과 분리로, 때로는 대화와 협력으로 얽힌다. 중요한 것은 이 얽힘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사회에서 종교는 과학기술시민성을 가진 호모 폴리티쿠스를 키워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에 대해 질문하고, 기술이 만들어갈 미래 사회의 가치를 논의하며,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것이 21세기 종교가 과학기술과 맺어야 할 관계다. 과학기술과 종교의 얽힘은 혼란이 아니라 풍요다. 다양한 목소리가 만나고, 다른 관점이 충돌하며, 새로운 통찰이 탄생하는 공간이다. 이 얽힘 속에서 우리는 좋은 사회를 향한 길을 찾을 수 있다. 과학기술과 종교, 그 둘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과학기술과 종교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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