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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살다 Sep 02. 2023

전주한옥마을 학인당과 얽힌 우리 집안 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미시적으로 읽기


전주한옥마을이 위치한 전주시 교동에는 100년이 넘는 고택 학인당이 있다. 수원 백가 백낙중 선생의 집이다. 백 선생은 조선 고종 때 영릉참봉을 지냈다. 널따란 팔작지붕의 학인당 본채는 궁궐양식으로 지어져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우리 집안은 이 학인당과 인연이 좀 있다. 우리 집안 본가 역시 전주한옥마을에 있었다. 학인당과 가까이 있었다. 우리 본가의 우측은 지금 강암서예관 일부까지, 좌측은 지금 교동 119 소방대 담까지이다. 아래로는 전주천에 맞닿았는데 지금은 도로로 편입되었다.

교동119소방대가 보이는 경기전길. 사진에서 보이는 공간에 우리 집안 본가가 있었다.


1920년대 초반 한옥마을이 오늘날 신도시로 개발될 때, 일본인들이 들어오자 뜻있는 전주 사람과 집안들이 들어와 오늘날 풍남동에 자리 잡았다. 향교를 중심으로 전주천을 따라 사대부 집안들이 들어와서 교동이 형성되었다. 한옥마을이 조성되기 전에는 향교로부터 조금 떨어져 몇몇 집만 있었고 이 동네를 청수마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20년을 기점으로 교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 집안도 교동에 들어와 터를 잡았다. 백가, 정가, 류가 등 옛 사대부 집안들이 함께 하였다.

백가 학인당은 단순히 큰 기와집이 아니었다. 집안 어른들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하면, 학인당은 오늘날 오페라하우스였다. 1908년 백낙중 선생은 패망한 조선 왕조를 기리며 궁궐 도편수를 불러 학인당을 세웠다. 본채 건물 높이는 2층 건물 정도이다. 소리가 잘 울리도록 하기 위해서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본채의 문틀은 탈부착이 가능했는데, 이는 판소리 실내무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학인당 본채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가락을 지키기 위한 백 선생의 의지를 보여준다

전주한옥마을 학인당


노년의 내 고조부와 집안을 이끌던 증조부가 때때로 학인당에서 흘러나오는 곡조에 잠기셨다곤 한다. 증조부는 학인당을 방문하여 여러 집안사람들과 교제하였다. 학인당이 문예를 통해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면, 내 증조부는 남문밖시장을 중심으로 한 민족 상권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는 오늘날 사회적 임팩트 투자자였다. 재산을 빼앗긴 채 남문밖시장으로 유입되는 이들이 장사를 하여 재기하도록 도왔으며 남문밖시장에 일본 자금이 돌지 않도록 금융 활동을 하셨다. 그리고 임실로 이어지는 전주 동남부 일대의 땅을 팔아 독립 자금으로 보내셨다.


교동 본가에 할머니의 당숙께서 종종 오셨다. 그 당숙 어른은 김제 만경 사람으로 부호였다. 그분은 일찍이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감시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3.1 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분이 되었다. 그분은 바로 <조선창극사>를 쓴 정노식 선생이다. 192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선생은 낙향하였다. 역사가들은 그 이후로 해방 직전까지 정 선생의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잘 알고 있다. 정노식 선생은 김제 만경으로 돌아오신 후 교동 우리 집에 와서 한동안 머물다가 어디로 훌쩍 떠나셨다. 그러다 다시 교동집에 머무셨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그 이유는 국내 최초의 판소리 저술인 <조선창극사>가 출판된 이후에 알게 되었다. 판소리에 조예가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정 선생은 교동집에 머물며 학인당에서 들려오는 판소리 가락에 심취하였다.



그 가락은 민립대학설립운동 실패로 힘들어진 그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민족 독립이 점점 멀어져 가는 듯하여 괴로웠던 정 선생을 민족의 판소리가 품에 안았다. 정 선생은 조선 판소리를 기록하고자 마음먹었다. 만경 재산을 팔아 조선 팔도를 유랑하며 88명의 명창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가사를 한글로 기록했다. 그 명창들에게 소리값을 주거나 밥을 샀으니 그 자금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정노식 선생은 조선의 소리를 기록하면서 학인당의 문예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한국 판소리계의 고전인 <조선창극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정노식 선생이 쓴 조선창극사



내 할아버지도 학인당과 인연이 있다. 우리 집안은 해방이 되자, 한옥마을 교동을 떠나 서인동으로, 고사동으로 터를 잡았다. 전주천 범람으로 피해가 심해지자 할아버지가 이전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학 농학과를 나온 후 전주에 와서 원예작물과 구황작물 재배법을 널리 알렸다. 논감자 재배를 통해 보릿고개를 넘기도록 도왔다. 토마토를 먹을 수 있게 개량하여 여러 사람의 영양 섭취를 도왔다. 해방 이후 할아버지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사동 정미소를 불하받았으며, 미 군정으로부터 지원품을 많이 얻어 전주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전주 YMCA야구단 창단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보건위생을 위해 정미소에서 나오는 쌀겨를 활용해 검은 비누를 만들어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그 비누의 이름은 협성이었다. 감리교인에게는 무척 익숙한 이름이었다. 내 조부는 기독교 감리회 신자였다.



한국전쟁이 반발하였다. 전주로 진입한 인민군은 당시 전주시에 하나밖에 없었던 고사동 정미소를 점령하고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당시 정미소는 오늘날 농촌마을 정미소 수준이 아니다. 농협 미곡종합처리장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정미소 창고문을 부수고 곡식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창고문이 열려 있으면 누구나 미곡을 가져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인민군은 창고 열쇠가 필요했고 할아버지는 열쇠를 가지고 숨었다. 며칠이 지나 할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잡혔다. 그들은 내 조부를 학인당으로 끌고 갔다. 한국전쟁 당시 학인당은 공산당 도당위원장이 머무는 곳이었다. 고사동 정미소는 보도위원 사무국으로 사용되었다. 할아버지는 열쇠를 빼앗긴 채 상당기간 학인당에 그리고 전주형무소에 억류되었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다. 그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성실히 봉사했던 점들이 참작되어 풀려나왔다고 한다.


전주시 영화의거리에 있는 CGV(왼쪽 붉은 건물) 뒤 뉴롯데오피스텔이 옛 고사동 정미소 자리이다.


교동 수원 백가 학인당은 교동 금녕 김가와 시대 속에서 얽혀 왔었다. 가끔 전주한옥마을에 가면, 나는 학인당을 찾는다. 그곳에서 내 증조부, 조부 그리고 정노식 선생의 흔적을 만나다. 그분들이 살아냈던 삶의 흔적으로 오늘 내가 만들어졌다. 내 아버지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듯, 언젠가 나도 내 딸에게 들려주리라. 그분들이 흘린 눈물과 땀 그리고 피가 내 삶의 방향을 보여주었듯, 내 딸에게도 그리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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