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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27. 2024

經(경)12.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어찌 되는가?_2

  - 상호례즉민이사야 / 《논어》 〈헌문편〉 제44장

經(경)12.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어찌 되는가?_2 / 上好禮則民易使也(상호례즉민이사야) - 《論語(논어)》 〈憲問篇(헌문편)〉 제44장

   이 문장에서 첫 번째로 꼽을 핵심 글자는 당연히 ‘禮(예)’자일 것입니다.

   물론 이 ‘禮(예)’자도 그 개념과 의미를 차근차근 천착해 들어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깊고 넓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禮(예)’를 단순하게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예의(禮儀)’ 정도의 상식 차원의 의미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서는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제 생각에 이 문장에서 진짜 핵심이 되는 글자는 ‘좋아할 호(好)’자입니다.

   만일 공자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좋아할 호(好)’자 대신 ‘명할 명(命)’자를 쓰셨다면요?

   그렇다면 이 대목은 ‘윗사람이 예를 명하면……’이 되겠지요.

   다시 말하면, 윗사람이 백성, 곧 아랫사람들에게 ‘예’를 지키라고 ‘명령하다’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이론의 여지가 없는 아름답고 절대적인 덕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강제되고 강요된다면 반드시 거기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또는 반발하고 싶거나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람의 본성 아닐까요.

   심지어 사랑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강요되고 강제되는 순간 그 본디 의미가 여지없이 퇴색되거나 격하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강요당하고 강제당하는 사람에게서 적어도 우선은 본능적인 반발심이나 불러일으키는 것이 고작 아닐까요.

   《단순한 기쁨》에서 피에르 신부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사랑은 어쩐지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소설가 정세랑도 그의 첫 장편소설인 《이만큼 가까이》에서 여봐란듯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지요.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여, 공자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좋아할 호(好)’자를 쓰셨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것을 좋아하면, 그 좋아하는 것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자꾸 반복하게 마련입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자꾸 먹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자꾸 듣거나, 좋아하는 장소에 자꾸 가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자꾸 만나는 것처럼요.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그리고 그 마음은 감출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은 기어이 사람들 눈에 띄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 문장, 이 공자님의 말씀에서, 예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좋아한다는 것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들, 곧 백성에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率先垂範), 곧 스스로 예를 실천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준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여 평소 자연스럽게 예를 지키는 모습이 아랫사람들, 곧 백성들 눈에 자꾸 띈다는 뜻입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게 마련입니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나아가 윗사람의 언행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맞추어 자기 태도를 결정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옛말이 왜 있겠으며,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왜 지금까지도 이렇듯 돌올하게 살아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그리고 그렇게 예를 좋아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아랫사람들, 곧 백성들의 눈에 띄면, 백성들은 윗사람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 윗사람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제가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저 ‘사민여승대제(使民如承大祭)’라는 말씀처럼, 그런 윗사람은 그야말로 ‘큰 제사를 지낼 때처럼’ 예를 다하여 백성을 존중하고 대접할 테니까요. 예를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이 어찌 백성을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윗사람이 애써 뭐라 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스스로 감복(感服)하여 그 윗사람을 진심으로 믿고, 존경하며, 따를 것입니다. 진심으로 따르니, 당연히 그 백성을 ‘수월하게 부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易使(이사)’ 곧 ‘쉽게 부려진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사태일 것입니다.

   그러니, ‘上好禮(상호례)’ 곧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백성을 ‘수월하게’ 부릴 수 있는 얼마나 ‘수월한’ 비결입니까.

   한데도 현실에서는 백성을 부리기 위하여 ‘좋아할 호(好)’가 아닌 ‘명할 명(命)’에 의존하는 사례가 훨씬 더 많은 것은, 혹은 적어도 훨씬 더 많은 듯 보이는 것은 도대체 어째서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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