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오야마 신지, 〈유레카〉
C47.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 – 아오야마 신지, 〈유레카〉(2000)
평범한 날의 우연한 참극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들은 같은 버스를 탑니다.
한 남자는 그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이고, 나머지 둘은 아직 어린 학생으로서 오누이입니다.
우리로 치면, 시골의 마을과 마을을 오가는 일종의 시외버스에 해당할 그 문제의 버스에 이들이 모인 것은 우연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으로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시 평범한 양복 차림의 사내가 버스에 올라타면서 모든 것이 삽시간에 무시무시한 비극의 현장으로 돌변합니다.
그 사내는 소지하고 있던 총으로 그 버스를 탈취하고 경찰과 대치하며 인질극을 벌입니다.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여기서 시드니 루멧의 〈뜨거운 오후〉(1975)에서와 같은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연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감독이 아오야마 신지이기 때문입니다.
아오야마 신지의 카메라는 결코 함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롱테이크의 연속이고, 트래킹의 아주 조용한 향연입니다.
게다가 음악은 영화가 시작한 지 반 시간이 넘도록 들려오지 않습니다. 기껏 나와도 카메라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더 느립니다.
무섭디 무서운 세상
영화는 가해자인 인질범의 사연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앞서 언급한 세 사람의 이야기가 된 것은 그들만이 참극의 버스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승객들과 한 명의 경찰은 예의 인질범이 무자비하게 쏜 총에 맞아 죽었거든요.
그들 셋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한 셈입니다. 죽음의 가차 없는 공포를 겪은 것이지요.
이 공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 업햄이라는 이름의 그 샌님 같은 독일어 통역병(제레미 데이비즈)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바로 눈앞에서 전우가 적군인 독일 병사와 사투를 벌이는데도 그는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채 아무런 행동도 못 하지 않습니까. 공포란 그런 것입니다.
바로 그런 극한의 공포를 그들 셋은 졸지에 겪은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심한 상처를 입었는가는 그들이 더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그 뒤의 상황이 그대로 대변해 줍니다.
직장도 다니지 못하고, 결혼생활도 파탄 나고, 학교도 못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유폐시킨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얼마나 무섭디 무서운 세상입니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총을 들이대며 생명을 위협하고, 나아가 가차 없이 앗아가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급조된 이상한 가족
결국 그들은 함께 뭉칩니다.
정확히 말하면, 버스 운전기사였던 사내(야쿠쇼 코지)가 이 어린 오누이를 찾아와 돌봐주는 모양새가 되는데, 기실 이것은 동병상련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헤아릴 수 있는 법이지요.
이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상한 모양새의 가족이 성립된, 아니, 급조된 현장입니다.
가족은 가족이되 유사(類似) 가족, 또는 대안(代案) 가족이라고 하면 될까요.
여기에 이 오누이의 사촌이라는 젊은이 하나가 예고 없이 가세합니다. 이 친구도 야쿠자한테서 죽음의 공포를 겪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집니다.
조용한 여행
어쨌거나 영화는 이 이상하게 형성된 이상한 형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러닝 타임을 두 시간쯤 소비할 때까지는요.
그리고 나머지 한 시간 삼십여 분 동안은 느닷없는 로드 무비입니다.
이대로 살다가는 이 아이들을 다시 예전처럼 회복시킬 수 없겠다고 판단한 이 사내 야쿠쇼 코지가 어디서 작은 버스 한 대를 구해와 거기에 모두를 태워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일종의 극약처방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면 이제부터 좀 분위기가 바뀌지 않겠느냐고요? 천만에요.
롱테이크는 도저하게 계속되고, 조용한 트래킹도 여전합니다.
이들도 여행을 떠나왔다고 들떠서 흥분하고 설치거나, 물색없이 호들갑을 떨거나, 되잖게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고요히 심드렁하게 이동할 뿐입니다.
여행지 특유의 저 한갓지고 홀가분한, 또는 설레고 흥분되는 정서 따위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말이 없고, 카메라는 하염없이 느리게 움직입니다.
도대체 무슨 영화가 이 지경이냐는 불평이 이쯤에서 나와야 정상입니다. 아니면, 졸거나요.
길고 긴 러닝 타임
한데, 지금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되새겨보아야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은 처음부터 강박적으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항이 있었지요. 이들이 어떤 참극을 겪었고,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를 말입니다.
이들은 지금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그런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싸움을, 조용히, 목숨을 걸고 벌이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투(死鬪)’입니다. 아주 엄중하고도 고요한 사투.
예,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그 상처를 이겨내고 극복하여 마침내 삶에 대한 의지를 회복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기다림을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준엄하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온갖 미학적 원칙들은 전부 이에 복무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무려 217분에 달하는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을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결코 러닝 타임 194분의 〈타이타닉〉(1998, 제임스 카메론)이나, 러닝 타임 192분의 〈아바타2 : 물의 길〉(2022, 제임스 카메론)과 같은 영화가 아니거든요.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예의
참 이상한 것은 무려 217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보고 나면 오히려 더욱더 다시 보고 싶어지는 기이한 매력으로 사람을 괴롭힌다는 사실입니다.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맨 처음입니다.
아마도 그 첫대목에서 그들이 받은 상처가 얼마만 한 것인가가 러닝 타임 전체를 통틀어 조금씩 조금씩 차차 명확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연해 보이는 일련의 자폐적인 행태와 비행들이,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마음이 점점 더 깊이 이해가 되니까 말입니다.
그들을 지켜보는 데 이렇듯 길고 긴 217분의 러닝 타임을 할애한 것 자체가 그들에 대한 예의의 표현일 것입니다. 예의이기에 ‘무려’ 217분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감독은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예의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