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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48. 무한 선인과 무한 악인 사이에서

- 양익준, 〈똥파리〉

by 김정수

C48. 가정폭력 대백과, 위악의 자서전, 무한 선인과 무한 악인 사이에서 – 양익준, 〈똥파리〉(2008)

무한 약골과 무한 강골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2000)에서 사무엘 L. 잭슨은 자기 몸에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뼈가 부러지고 마는 약골, 그야말로 무한 약골입니다. 이래서야 온전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저주받은 육체요, 저주받은 운명입니다.

하지만 그는 살고 싶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합니다.

‘나와 같은 무한 약골이 존재한다면, 나하고는 정반대가 되는 무한 강골도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땅이 있으면 바다가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추위가 있으면 더위가 있듯이, 무한 약골이 있다면 무한 강골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야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정말 살 이유가 없다.’

예, 그렇지 않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세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공할 만한 만행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무한 강골, 브루스 윌리스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고야 맙니다.

평생 감기 한 번 걸려본 적이 없고, 직장에 결근 한 번 한 적이 없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끔찍한 참사 속에서도 꿋꿋이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살아남은 괴물 같은 인간―.

그렇습니다. 그는 드디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아니, 저주받은 운명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나머지 한 짝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운명을 수긍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갈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언브레이커블〉은 분명 해피엔딩의 영화입니다.

하지만 〈언브레이커블〉의 그 두 핵심 인물은 아주 특별한 사례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대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양극단 사이에 무수한 층위로 나뉘어 여기저기 서성이며 존재합니다. 조금 더 강하거나, 조금 더 약할 뿐이지요.


무한 선인과 무한 악인

〈언브레이커블〉에 나오는 것과 같은 무한 약골과 무한 강골의 사례가 실제로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한 선인과 무한 악인의 사례는 어쩌면 정말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제법 널리 알려진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사이코패스’입니다.

흔히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풀이되는 바로 그 사이코패스―. 여기서 ‘장애’라는 말은 타고났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선천적인 장애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이코패스는 감정 조절 중추로 알려진 두뇌 전두엽 부분의 기능이 일반사람의 15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이런 사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무감각하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위 아예 느낄 줄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인간의 공격 성향 억제 물질인 세로토닌도 일반사람들보다 많이 모자라서 별것 아닌 일로도 아주 극단적인 공격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네요.

한 마디로, 대책 없는 무한 악인인 셈입니다. 대개의 연쇄살인범이 이런 사이코패스라고 하는데, 어디 연쇄살인범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이코패스와 정반대 되는 사람, 그러니까 무한 선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이 대목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저는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저는 〈언브레이커블〉의 무한 약골 사무엘 L. 잭슨의 편입니다. 저는 그와 똑같은 생각을 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무한 악인이 있다면 무한 선인도 있을 것이다. 없을 리가 없다. 만약에 없다면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 세상은 말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잠시라도 더 살고 싶지 않다.’

저는 무한 선인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부친의 죽음과 함께 가정이 풍비박산 났는데도 끝내 비뚤어지지 않고 자기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며―‘도우며’가 아닙니다. ‘돕는 것’과 ‘돌보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살겠다는 장한 결심을 하고, 마침내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면서 일평생을 한결같이 살아내고야 만 저 마더 테레사 같은 인물이 무한 선인이 아니라고 믿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만 보면 선하고 악한 것이 그저 타고난 자질일 뿐이라는 고약한 궤변이 되고 말겠지요.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른 누구한테도 대놓고 죄를 물을 수 없을 것이고, 또 선행을 한 누구도 마음껏 칭찬하거나 기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어쨌거나 무한 약골과 무한 강골 사이의 어디쯤에서 서성이는 존재이듯, 어쨌거나 무한 선인과 무한 악인 사이의 어디쯤에서 서성이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정도 선에서 멈추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어쨌거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적당한 비율’로, 동시에 지닌 채 태어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따위도 다 이런 고민의 결과들이 아니겠습니까.

〈똥파리〉의 등장인물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바로 이런 사람들. 우리와 똑같은. 나와 똑같은.


상훈의 정체

한데, 〈똥파리〉의 등장인물들이 우리와, 또 나와 똑같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고 말해놓고 나니, 마음속에 이상한 파문이 일어납니다.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솟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또는 느끼는 이상한 괴리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마음의 소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또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훨씬 더 선한 사람들이다.’

어째서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아마도 이 글의 진짜 본론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우선 이런 의문에 답해야 합니다.

‘〈똥파리〉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저지르는 행위가 과연 악인가?’

이것은 주로 폭력의 모양새로 저지르는 행위입니다. 여기에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욕설도 포함됩니다.

그러니 거두절미하고 그냥 폭력이라고 말하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상훈(양익준)이 그렇습니다.

그의 폭력은 주로 사람을 때리는 것입니다. 팬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사람 패는 일로 먹고사는 인물입니다.

이를 직업의 개념에 비추어 말하자면 ‘돈을 받아내는 일’이 되겠지만, 이것은 ‘패는’ 일을 수반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업무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아버지도 팹니다. 빚을 지고도 돈을 갚지 않는, 또는 못하는 사람을 패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지만, 아버지를 패는 것은 고통스러운 마음의 상처를 견디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빚쟁이를 패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고, 아버지를 패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한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상훈은, 오랜 영어(囹圄) 생활로 건강도 시원치 않은 아버지를 그저 볼 때마다 한 번씩 두들겨 패면서도 결코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물론 오래 두고 괴롭히고 싶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스스로 자기 손목을 그었을 때 상훈은 그 아버지를 들쳐업고 미친 듯이 병원으로 달려가 자기 피를 뽑아서라도 아버지를 살려내라고 난동을 부립니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상훈은 그때까지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지리만큼 필사적입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아니,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뿐이 아닙니다. 상훈은 친누이도 아닌 이복누이와 그 누이의 어린 아들한테 끊임없이 마음을 씁니다. 그저 입만 열면 욕이고, 하는 짓이라고는 이 사람 저 사람 두들겨 패는 일뿐인 그가 어쩌자고 이러는 것일까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가리켜 ‘위악(僞惡)’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상훈은 위악자(僞惡者)입니다.

아니, 상훈뿐만이 아니라 〈똥파리〉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위악자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위악과 위선

위선(僞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선인이 아니라 악인입니다. 악하기에 선으로 스스로를 꾸밀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선인입니다. 선하기에 악으로 스스로를 꾸밀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꾸미기가 필요한 것은 언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똥파리〉의 등장인물들이 왜 위악자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할 것입니다.

여기서도 과녁은 상훈입니다.

상훈은 선하게는, 또는 선한 본성대로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못된’ 아버지 때문에 애꿎은 여동생과 어머니가 죽어버린 아프디 아픈 상처와 분노를 안고 있습니다.

하도 어린 시절에 벌어진 일이라 사태를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듯 ‘잘못’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영화 속 플래시백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상훈은 오해나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훈의 아버지는 제삼자의 처지에서 보아도 죽어 마땅한 악인입니다. 게다가 이 아버지는 아마도 딸 살해 혐의로 복역하다 최근에야 출소하여 아들 앞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상훈은 고아처럼 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가진 것도 없이 홀로 남은 그가 온전히 살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가 어째서 사람을 패고 돈을 받아내는 일을, 그러니까 용역 깡패 노릇을 하며 살게 되었는지는 이로써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복누이와 그 누이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까지 있습니다. ‘그에게는 ∼가 있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째서인지, 친누이도 아닌 그 이복누이와 그 누이의 어린 아들까지 애써 돌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치 자신한테 부양의무가 있는 처자권속인 듯 챙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들한테 마음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의무감입니다. 이런 의무감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긴 걸까요?

그에게 그래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예, 그들한테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한데도 그는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합니다.

그가 그러는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뿐입니다. 그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보다 더 선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제야 사태가 자명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는 선한데 악한 짓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야 하니, 애써 악한 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최면이기도 합니다.

‘나는 악하다. 악하니까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당연하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를 상대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악행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충분한 자기 암시, 자기 최면이 없이 악행을 저지르면 그는 그 가혹한 이율배반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미쳐버리고 말지도 모릅니다.

선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면서 살자면 결국 ‘위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그의 악행은 위악입니다. 이것이 그의 행위에 대한 가장 적확한 명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똥파리〉는 바로 선한 사람 상훈의 ‘위악의 자서전’인 셈입니다.


영재의 경우와 만식의 경우

연희(김꽃비)의 남동생인 영재(이환)는 아마도 가장 상훈을 많이 닮은 위악자일 것입니다. 그 또한 위악이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위인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훈과 연희 사이에 이루어진 그 꿈같은 인연조차 영재의 장래를 상훈과 다른 쪽으로 이끌어가는 구실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은 〈똥파리〉의 가장 뼈아픈 대목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또 다른 판본에 해당하는 위악의 자서전이 될 것입니다. 그의 장래가 한없이 걱정스럽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만식(정만식)입니다. 저는 이 사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똥파리〉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을 통틀어 가장 악한 사람입니다. 아니, 그저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악하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의 악은 위악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그의 악은 진짜 악입니다. 더 ‘높은 곳’, 진짜 ‘높은 곳’에 있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한데도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의 업무는 상훈을 필두로 한 악행들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그 일조차 집어치우고 고깃집을 엽니다. 이것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얼른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식은 악을 관리할 뿐 직접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은 아닙니다. 선으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일선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아랫것들을 역시 그와 똑같은 악으로 대하면 그 관리체계는 당장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랫것들이 탈 없이 계속 악행을 저질러주기를 바란다면 그들을 선으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랫것들을 패지도 않고, 툭하면 그들을 패는 상훈에게 오히려 그러지 말라고 힘주어 타이르고, 일을 잘하면 칭찬도 해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좋은 말로 다독여주기도 합니다.

심지어 상훈의 아버지한테까지 마음을 써줍니다. “고아인 나는 그런 아버지라도 있으면 좋겠다”라는 낯간지러운 신파조의 말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게다가 그는 이상하리만큼 잘 웃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는 상훈에게, 그리고 아랫것들에게 돈을 줍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일은 그 아랫것들의 악행을 무사히 지속시키는 일입니다. 이거야말로 진짜배기 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만식의 선은 선이 아니라 위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데도 감독은 그를 선하게, 선한 느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느낌이지만, 만식에게서는 악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그가 악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마음으로는 그가 악인처럼 느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은 연출의 실패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도 듭니다. 또는 캐스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똥파리〉에서 만식의 악스러움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거의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확실히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이런 이상한 느낌으로 만식을 묘사한 감독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만식은 위선자입니다. 그러니까 만식이야말로 진짜 악인인 셈입니다. 저는 만식을 제외한다면 〈똥파리〉에는 단 한 사람의 악인도 없다고까지 말하고 싶은 정도입니다.

한데도 만식은 이상하리만큼 선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것만은 정말 풀 길 없는 의문입니다.

어쩌면 감독은 여기에서 멈춘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갈 수 있는데, 더 나아가야 하는데, 그만 멈추어버린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이라고 하면 될까요.


가난과 가정폭력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남는 것은 무수한 질문들입니다. 이토록 많은 질문을 남겨주는 영화가 또 있었나 싶은 정도입니다.

핵심이 되는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모든 위악과 위선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가난과 가정폭력입니다.

〈똥파리〉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과도하게 가난합니다. 그 과도한 가난 속에 있는 것은 또 과도한 폭력입니다. 그 폭력은 또 하나같이 가장의 폭력입니다. 아버지의 폭력이요, 남자의 폭력입니다.

물론 그 가장은 가장 구실을 전혀 못 하고 있는 가장, 허깨비 가장입니다.

그렇게 〈똥파리〉는 온갖 모양새의 가정폭력을 다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난장판의 전시장입니다. 명실상부, 가정폭력 대백과지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음은, 이 가난과 가정폭력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질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추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이자 추궁―.

대답을 하려면 추궁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답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가난과 가정폭력의 배경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무엇이 그 가난과 가정폭력을 있게 하였는지, 무엇이 그 원흉인지―.

이 영화가 러닝 타임을 조금 더 써서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아버지들을 위한 러닝 타임이 좀 더 필요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그 아버지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어째서 그토록 딱하디 딱한 가정폭력의 주체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세상에 자기 처자식이 불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가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폭력 또한 갈데없는 위악일진대, 이 영화는 거기에 충분히 눈길을 주지 않는 느낌입니다.

참 딱하고 슬픈, 가슴 저미는 위악의 목록입니다. 어쩌면 〈똥파리〉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한테서 듣고 싶은 것 같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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