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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49. 소녀의 사랑을 의심함

- 토마스 알프레드슨, 〈렛 미 인〉

by 김정수

C49. 소녀의 사랑을 의심함 – 토마스 알프레드슨, 〈렛 미 인〉(2008)

사랑?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물음표를 붙일 수밖에 없네요.

하긴 이 영화는 흡혈귀 소녀와 인간 소년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우선은, 읽힙니다. 아니, 그렇게 보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흡혈귀 소녀가 자신은 ‘아주 오랫동안’ 고작 열두 살의 나이로 살아왔다고 고백해도, 그래서 그것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닐 조던)에서 역시 소녀 흡혈귀 클로디아 역으로 나왔던 커스틴 던스트가 영원히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탓에 아무도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해도, 역시 〈렛 미 인〉은, 우선은, 사랑 이야기라고 규정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 소녀와 소년의 만남은 확실하고, 그러니만큼 절절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이 영화를 ‘그저’ 흡혈귀 소녀와 인간 소년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쪽이어서 사랑이되 ‘사랑?’이라고 물음표를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실은 〈렛 미 인〉이 사랑 이야기의 옷을 입고는 있지만, 정작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생계형 흡혈귀

흡혈귀 세계에도 빈부격차가 있다면 〈렛 미 인〉의 흡혈귀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는 제가 보기에 거의 극빈층에 속합니다.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형편이지요. 몇 날 며칠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나날이 핏기 없이 파리해져 가는 그 안색을 보고 있으면 이엘리는 머지않아 굶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사람이라면 무료 급식소라도 찾아가 최소한 목구멍에 거미줄은 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누가 흡혈귀를 위한 무료 급식소, 아니, 무료 ‘급혈소’라도 따로 만들어 주지 않는 한 이 흡혈귀 소녀 이엘리의 장래는 참으로 암담해 보입니다.

한 마디로 〈렛 미 인〉은 흡혈귀도 먹고살아야 한다, 나아가 먹어야 산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아니, 흡혈귀한테도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대놓고 주장하는 영화입니다.

〈언더 월드〉(2003, 렌 와이즈먼)에서처럼 어둠의 세계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거창한 목적의식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 또 하루 먹고사는 것이 문제일 따름입니다. 우리네 삶이 그런 것처럼요. 제 생각에 이토록 철저한 생계형 흡혈귀는 처음입니다.

게다가 이엘리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기에도 여의치가 않은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엘리가 ‘고정된’ 열두 살 소녀의 모습이라는 점이 가장 결정적이지요. 열두 살이라면 학교에 다니는 것밖에는 인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미성년자 아르바이트도 법적으로 제한 연령이 있는데,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기에 영국에서 열 살 미만의 어린이한테 위험천만한 굴뚝 청소를 시켰던 참혹한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찰스 램은 이것을 에세이로 쓰기도 하였지요. 바로 이것이 소녀 흡혈귀한테는 일종의 족쇄가 되어 있는 형국이니, 참 난감합니다.

이엘리는 어쩌다가 그 어린 나이에 흡혈귀한테 물렸는지, 그야말로 딱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영화는 이엘리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구체적으로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상한 동거, 의도적인 접근

저는 이엘리와 함께 사는 이 ‘인간 남자 어른’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이토록 흥미로운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 목도한 것이 도대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는 이 어린 소녀 흡혈귀를 먹여 살리기 위해 거듭 살인을 저지릅니다.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경우와 어쩌면 그토록 닮아 있는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그의 연쇄 살인 행각이 그리 끔찍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혈액 수집은 외동딸을 먹여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절절함을 너무도 닮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기이한 동거의 형태를 저는 흡혈귀 영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한데, 이 사내는 어딘가 조금 이상합니다. 몰골 자체도 그렇지만, 소녀를 대하는 태도가 처음부터 수상쩍습니다. 그냥 대놓고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이 관계의 본질은 소녀가 소년을 만나고 난 뒤로 살짝살짝 그 정체를 엿보이다가 마침내 그의 최후에 이르러 전모를 드러냅니다. 아니, 더는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 영화에서 소녀와 소년의 만남은 소녀 쪽에서 먼저 소년 쪽으로 접근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소년은 소녀에게 ‘선택된’ 것입니다. 요컨대 이것은 지극히 의도적인 접근이요, 고의적인 선택입니다.

소녀가 소년의 마음을 얻는 과정을 보십시오. 소녀는 소년이 처해 있는 곤란한 상황을 자신만의 능력, 곧 가공할 만한 ‘흡혈’ 능력을 동원하여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 소년의 마음을 얻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 능력으로 해결해 줄 만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년을 물색했는지도 모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시점입니다. 소녀가 소년을 물색하기 시작한 시점―. 실은 여기에 이 영화의 본론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소녀가 처해 있는 상황의 본질

지금 이 소녀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국면만을 따지면 소녀는 가장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인간 어른 남자’가 늘 살인을 저질러 자신이 먹어야 할 피를 얻어오니까요.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그뿐입니다. 물론 참 재미없는 인생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먹고살 걱정은 없는 셈입니다. 피는 세상 어디에나 널려 있고, 언제나 필요하면 그 피를 섭취하면 그만이니까요.

경제위기 따위는 흡혈귀 소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적어도 그 사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고, 소녀를 위하여 저지르는 살인을 중단할 뜻이 없다면 말입니다.

한데,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사내는 젊은이가 아닙니다. 어른이라고 했지만, 실은 노인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늙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늙어갑니다. 늙는다는 것은 쇠약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남자와 이엘리의 관계가 정상적인 부녀 관계라면 적어도 소녀는 남자가 죽기 전에 이 인간 세상에서 성인으로서 직업을 구하여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남자의 죽음이 이 소녀의 장래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요. 그게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사지요.

하지만 이 남자는 영화 속에서 이미 상당히 늙은 상태고, 건강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소녀를 위해서 피를 구하는 일에 자꾸 실패합니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멈추기까지 합니다.

바야흐로 소녀의 생계가 위기에 처했다는 뜻입니다. 더는 이 남자가 소녀를 먹여 살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국면입니다. 결국 소녀는 하는 수 없이 스스로 사냥(!)에 나섭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그럴 값이라면 처음부터 스스로 사냥을 하면 될 일을 왜 굳이 이 인간 남자 어른에게 의지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나를 좀 들여보내 줘!

이것은 저만의 해석입니다.

남자는 소녀가 직접 사냥하여 소녀의 손에, 아니 입에 피를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딸의 살인 행각을 원치 않을 테고,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 정도로 소녀를 아끼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후자 쪽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입니까?

저는 이 남자가 소년의 ‘미래형’이라는 생각입니다.

요컨대 지금 소녀는 장차 또 다른 인간 어른 남자로서 자신을 먹여 살릴 누군가를 물색하는 중입니다. 그래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는 더는 소녀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시점에 다다른 것입니다. 늙었기 때문이지요. 정년퇴임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녀가 남자의 대안으로 소년을 물색했고, 마침내 소년에게 접근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늘밤은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소녀에게 간청하는 남자의 그 가슴이 미어지는 애처로움―.

실제로 소녀의 처지에서는 이것 말고는 살아갈 방도가 현실적으로 없기도 합니다. 여기서 소녀의 과거를 짐작해봅니다. 소녀는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열두 살로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적어도 수백 년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이 어른 남자가 열두 살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는 되겠지요.

소녀는 그 옛날 또래 소년을 물색하고 선택한 뒤 접근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려고 소녀는 흡혈귀로서 자기가 지닌 능력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소녀가 소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요.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소녀는 그 남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남자를 영원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남자가 소녀의 몇 번째 소년인지가 궁금하지만, 굳이 따지고 들 성질의 문제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니까요. 그러니까 소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소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녀가 소년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 놀랍습니다.

소녀는 소년을 위협하지도, 협박하지도, 겁을 주지도, 유혹하지도 않습니다. 소녀가 소년에게 하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렛 미 인’이라는 말에 대한 답을 듣는 것입니다.

소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놀랍습니다.

잠시 돌봐주다가 싫증을 내거나 지쳐서, 또는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져서 소녀를 외면하거나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녀 곁에 있으면서 소녀를 위해 피를 구해줄 사람을 구하려면 역시 이 정도의 과정은 거쳐야 하지 않겠나, 싶기는 합니다.

소녀가 끊임없이 ‘렛 미 인’을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흡혈귀 고유의 규칙인지, 아니면, 소녀 스스로 만든 규칙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곧 온몸으로 피를 쏟는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하였는데도 ‘렛 미 인’에 대하여 소녀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을 사람이라면 초장에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녀는 여기에 ‘플리즈’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를 들여보내 줘’가 아니라 ‘나를 들여보내 줘야 해’로도 새겨집니다.


이 끔찍한 영원 반복!

이것은 소녀에게는 가혹한 생존의 법칙이요, 소년에게는 잔인한 운명입니다.

소녀와 소년이 장차 어떤 식으로 함께 살아가게 될지를 상상해보면 참 끔찍합니다.

둘을 명실상부한 연인관계라고 상정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소녀는 영원히 열두 살 소녀로 남아 있을 테지만, 소년은 자꾸 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스무 살 청년이 되고, 마흔 살 장년이 되고, 예순 살, 일흔 살, 여든 살 노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 어렵습니다. 자칫 이웃한테 발각되면 남자는 파렴치범으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중간에 아주 짧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녀의 찢어진 아랫배 인서트는 어쩌면 그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한 군데 오래도록 정착해서 살 수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합니다.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은 종이상자 속에 담긴 소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납니다. 아무리 어린 열두 살이라도 그 끔찍한 사지 절단의 살인을 벌인 현장에서 계속 살아갈 수는 없겠지요. 떠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 소녀는 피만 먹으면 살아갈 수 있겠지만, 소년은 여느 인간들처럼 정상적으로 음식을 섭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자면 밥벌이,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이 문제만큼은 소녀 흡혈귀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소녀를 위해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살인을 저질러야 합니다.

하지만 소년도 그 ‘인간 어른 남자’처럼 차츰 늙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병약해진 자신을 깨닫고, 나아가 그런 삶을 사는 자신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역시 살인 행각을 언젠가는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소녀는 또 다른 소년을 물색하겠지요.

아, 이 끔찍한 비극의 영원 반복!

이 끝없이 반복되는 비극을 끝내려면, 영화 속에서 소녀에게 물려 흡혈귀로 변하려던 여인처럼, 눈부신 햇살 속에 소녀가 스스로를 드러내 자폭하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박찬욱의 〈박쥐〉(2009)에서는 송강호와 김옥빈이 그런 방식으로 장엄한 최후를 맞지요.

하지만 소녀는 어쩐지 그럴 뜻이 없어 보입니다. 소녀는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년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어쩐지 이 해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면 소녀는 사랑 중독증이 틀림없습니다. 계속 그런 사랑을 해야 한다는 뜻일 테니까요.


나를 받아줘(야만 해)!

제가 보기에 소녀는 이런 관계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사랑은 언젠가는 반드시 식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년에 대한 소녀의 감정의 순수성을 의심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러니까 새로운 소년을 물색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을 써서라도 인간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는 의지―. 이것이 저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녀 흡혈귀가 참 무섭습니다. 지금까지 영화 속에 등장했던 모든 흡혈귀를 통틀어 가장 무서운 흡혈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명력, 이 의지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엄혹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입니다.

렛 미 인! 나 좀 들어가게 해줘! 나를 좀 받아줘! 나를 받아줘야만 해!

참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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