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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51. 담담히 물러나는 여인의 이야기

- 나루세 미키오, 〈긴자화장〉

by 김정수

C51. 담담히 물러나는 여인의 이야기 – 나루세 미키오, 〈긴자화장(銀座化粧)〉(1951)

지정학적 위치

〈긴자화장〉의 제작 연도는 1951년, 한국전쟁 중입니다. 오즈 야스지로가 〈바람 속의 암탉〉(1948년)을 만든 지 세 해 뒤, 미조구치 겐지가 〈오하루의 일생〉(1952년)을 만들기 한 해 전이네요.

왜 하필 이 두 작품을 보기로 들었느냐고요? 바로 이 세 편의 주인공이 모두 다나카 기누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오즈 야스지로의 다나카 기누요는 〈바람 속의 암탉〉으로 기억하고, 미조구치 겐지의 다나카 기누요는 〈오하루의 일생〉으로 기억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나루세 미키오의 〈긴자화장〉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의미롭게 생각하는 〈긴자화장〉의 ‘지정학적’ 위치입니다.

물론 다나카 기누요는 오즈 야스지로의 여인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도 아닙니다. 다나카 기누요가 ‘어쨌거나’ 미조구치 겐지의 여인이라는 기왕의 제 생각에는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어쨌거나’ 오즈 야스지로의 여인은 하라 세츠코이고,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은 다카미네 히데코인 것도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 다나카 기누요는 미조구치 겐지의 〈오하루의 일생〉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다나카 기누요

따라서 ‘나루세 미키오의 다나카 기누요’는 저한테 어쩐지 조금 낯선 말입니다.

앞서도 밝혔듯이, 저는 다나카 기누요를 ‘어쨌거나’ 미조구치 겐지의 여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영화도 아닌, 바로 미조구치 겐지의 〈오하루의 일생〉에서 다나카 기누요는 그 어떤 일본 여배우도 이룩해내지 못한 하나의 ‘몸가짐’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제 평가입니다. 이는 다나카 기누요가 미조구치 겐지의 여인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 사태입니다.

그 몸가짐은 제가 그 어떤 일본 여배우한테서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저는 감히 ‘일본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정도입니다. 우리로 치면 최은희나 김지미가 이룩한 그 어떤 가장 ‘한국적인’ 몸가짐과 같은 차원에서 가장 ‘일본적인’ 몸가짐을 다나카 기누요가 〈오하루의 일생〉에서 이룩했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 〈긴자화장〉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입니다. 여기에 다카미네 히데코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관심 있게 보는 또 하나의 일본 여배우인 카가와 교코가 중요한 조연으로 나옵니다.

다나카 기누요와 카가와 교코,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지요.

이것이 제가 〈긴자화장〉을 보아야만 했던 이유인 셈입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나루세 미키오도 고작 세 번째 이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세대의 여배우들

다나카 기누요와 카가와 교코는 세대가 다릅니다. 그것도 가운데 하라 세츠코나 다카미네 히데코 세대를 두고 떨어져 있는, 제법 나이 차이가 나는 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다나카 기누요가 1910년생, 하라 세츠코가 1920년생, 다카미네 히데코가 1924년생, 그리고 카가와 교코가 1931년생이니까요. 얼추 각각 10년 정도의 세대 간격이 있는 셈입니다.

더욱이 다나카 기누요와 카가와 교코 사이에는 20년이라는 만만치 않은 세월의 간격이 놓여 있습니다. 세대가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기구하지만 아름다운 여인

저는 〈긴자화장〉을 물러나는, 또는 물러가는 여인의 이야기라고 규정합니다. 다음 세대한테 일종의 주도권을 건네주고 표표히 물러나는 세대의 여인이지요.

하여 영화에서 적어도 겉보기의 정서는 제법 담담하지만, 그 밑에 흐르는 정서는 상당히 서글픈 것입니다. 아마 이런 삶의 서글픔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다나카 기누요와 카가와 교코를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요컨대 다카미네 히데코를 캐스팅했다면 썩 그럴듯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을 공산이 크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캐스팅은 적절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영화 속에서 현재 다나카 기누요는 후배(동생) ‘아가씨’들이 있는 술집을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주인으로서 경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실무적으로만 운영을 맡고 있는 일종의 ‘큰언니’ 역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나카 기누요가 가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구하려다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전자에 가깝지 않나, 하고 추측해 봅니다.

흥미롭게도 그 술집 이름이 ‘벨 아미(불어로 ‘아름다운 친구’라는 뜻이지요)’인데, 물론 이는 프랑스의 문호인 기 드 모파상의 소설 제목이기도 합니다. 1950년대의 술집 이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입가에 싱긋 웃음을 베어 물게 됩니다. 이런 설정 자체가 제게는 참 정감 있게 다가오는 요소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다나카 기누요가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한테 버림받은 신세이며, 그래서 아비 없는 외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차례로 밝혀집니다.

물론 이렇게만 말해놓으면 기구한 신세의 여인이라는 느낌이 앞서지만, 영화에서 다나카 기누요는 그리 불행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 자기 일에 성심을 다하는 충실한 삶을 살고 있으며,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인생의 후반기를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는 소망 또한 품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다나카 기누요는 아직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우연히 찾아온 사랑의 기회

그런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옵니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기회 말입니다. 그것도 남편감으로 그만하면 썩 괜찮다 싶은 젊고, 성실하고, 정의롭고, 문학에 대한 조예도 남달리 깊은 사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얼마간 샌님 타입인 것도 같지만, 다나카 기누요의 신분과 견주어 상대적으로 적잖게 순수하다는 느낌이 드는 인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술집에서 일하는 처지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인간형이라고나 할까요.

다나카 기누요는 어느 날 비슷한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영화에서는 아마도 어떤 재력가의 첩쯤 되는 것 같습니다―친구한테서 좀 ‘이상한’ 부탁을 받습니다. 마침 한 다리 건너 알고 있는 어느 유력가 집안의 자제가 시골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동경으로 올라오니, 자기를 대신하여 시내 구경을 시켜달라고 부탁해 온 것입니다.

아마도 그 시절 일본에서는 그런 식의 일상 풍경이 드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긴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에서도 시골의 노부부가 도쿄로 올라와 며느리인 하라 세츠코의 안내로 시내 구경을 하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오지요.

한데, 이를 어쩝니까. 다나카 기누요는 한눈에 그 남자가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그것이 다나카 기누요의 얼굴과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관객 처지에서는 다나카 기누요를 응원해주고 싶은, 그래서 그들이 행복하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풍경입니다.


느닷없는 사건, 물러남의 조건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느닷없는 사건 하나를 배치함으로써 이야기의 방향을 ‘야속하게도’ 틀어버립니다. 어쨌거나 다나카 기누요는 물러나야 하는 세대의 여인인 것입니다.

문제의 외아들이 ‘잠시’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엄마 다나카 기누요는 하는 수 없이 급한 대로 동생―친동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인 카가와 교코한테 남자의 안내를 맡기고, 서둘러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물론 이 영화는 어린이 유괴담 따위는 아니니, 이 아들은 머지않아 집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문제는 그 사이 남자와 카가와 교코가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나카 기누요가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를 동생이 차지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영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처리하여 보여줍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다나카 기누요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답게 이내 체념합니다. 운명으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컨대 물러나는 것이지요.


물러나는 여인의 슬픔

그리고 다시 일상의 삶이 계속됩니다. 영화는 그냥 이렇게 끝납니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도 무심한 이 종결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 시간이 흐르면서 신비스럽게도 조금씩 조금씩 가슴을 저미고 듭니다. 이것만은 다나카 기누요가 아니라 나루세 미키오의 솜씨임을 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 그 물러나는 여자가 다름 아닌 다나카 기누요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결말이기도 합니다.

〈부운〉(1955)이 무엇보다도 압권이었지만, 〈긴자화장〉 또한 나루세 미키오의 저 ‘슬픈’ 영화들의 계보에 당당히 포함되는 한 편이라는 것은 역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더하여, 물려받는, 또는 이어받는 처지의 여인이 다름 아닌 카가와 교코이기에 다나카 기누요의 물러남을 관객으로서 저 또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 카가와 교코라면!’ 하는 마음 말입니다.

나루세 미키오와 다나카 기누요와 카가와 교코, 이 셋의 조합이 〈긴자화장〉을 그야말로 조용히 빛나는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구실을 하는 가장 주요한 비결임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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