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C52.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 마이클 무어, 〈식코〉

by 김정수

C52.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 마이클 무어, 〈식코〉(2007)

강요받은 선택

제가 메릴 스트립을 메릴 스트립으로 인지한 첫 영화는 〈소피의 선택〉(1982, 알란 J. 파큘라)이었습니다.

한 장면이 가슴 깊이 남아 두고두고 잊히지를 않습니다. 그녀가 독일 나치에게 자기 두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도대체 그걸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것은 게임도, 도박도, 추첨도, 야바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를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입니다. 엄마가 자기 아이를 선택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선택과 배제의 갈림길, 아니,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원죄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녀의 책임이 아니건만, 그녀는 평생 그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 강제된 죄책감의 가공할 만한 끈질김―.


두 개의 손가락

〈식코〉의 초반부를 이렇게 이름 붙여보면 어떨까요. ‘절단된 손가락 두 개의 시퀀스’라고요. 이 시퀀스에서 6만 달러, 12만 달러 운운하는 내레이션이 오가는 동안 저는 불현듯 〈소피의 선택〉의 그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아니, 그것은 저절로, 기다렸다는 듯이, 오랜 세월 쌓인 먼지를 툭툭 털고 기억의 저편에서 훌쩍 튀어 올랐습니다. 도대체 그것을, 그런 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우리 조상들은 자식을 손가락에 비유했습니다. 자식의 수가 많아지면 당연히 더 애정이 가는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도, 그것이 인지상정임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그 자식들을 손가락에 비유하여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식으로 애써 그 차이를 무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참 속 깊은 배려 아닙니까.

여기서 저는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두 자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와 두 손가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선택의 갈림길에 선 인간

〈식코〉에서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멀쩡하게 되살릴 수 있는 손가락 하나를 영원히 잃어버려야 한다는 그 어처구니없는 운명과 맞닥뜨린 그 사내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겨우, 감히, 이렇게 넘겨짚어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소피의 선택〉에서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를 선택해야만 했던 메릴 스트립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고요. 아니, 그 어미의 심정에서, 손가락 하나를 영원히 포기해야만 하는 그 사내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미루어 헤아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평상심으로 보았다면 〈식코〉의 그 장면에서, 그러니까 그 선택받지 못한 손가락이 쓰레기 매립장에서 새들의 먹이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그 한없이 냉소적인 내레이션을 들으며 아마 실소를 금치 못했겠지만, 이미 〈소피의 선택〉을 떠올린 저는 벌써 숨이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식코〉는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 그러나 실은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아니 ‘선택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의 실상―.


그들의 실상, 우리의 현실

여기서 이 다큐멘터리를 미국 의료보장제도의 실상을 다룬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이러쿵저러쿵 비판의 소리를 입에 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절단된 두 개의 손가락 시퀀스 이후로 미국 의료보험제도의 문제점 따위는 이미 제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어느새 제가 처해 있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눈은 미국의 실상을 바라보면서 머리는 내 나라의 실상,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의 실상에 대한 생각으로 금세 꽉 차버린 것이지요.

그 생각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외려 더 극심해졌지요. 암담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중병에 걸렸을 경우 그 병시중을 드느라 한 가정이 경제적으로, 나아가 정신적으로 몰락하는 상황은 그들의 이야기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 아닙니까.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라는 이 한 가지 단서에서부터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지금 이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또는 나아가려는, 또는 장차 나아가게 될지도 모를 방향에 대한 총체적인 우려와 고민을 새삼 정색을 하고 시작하게 만든다는 점만으로도 이 다큐멘터리의 효능은 넉넉하지 않나, 싶은 것이 제 소감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날카로운 비판과 사려 깊은 헤아림의 소지가 있다는 걸 잘 알지만요. *

keyword
이전 21화C51. 담담히 물러나는 여인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