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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54. 사랑은 믿음의 문제다

- 박진표, 〈너는 내 운명〉

by 김정수

C54. 사랑은 믿음의 문제다 – 박진표, 〈너는 내 운명〉(2005)

감정이냐, 의지냐

사랑은 감정의 문제일까요, 의지의 문제일까요.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이란 변하게 마련이라 주장할 것이고, 의지의 문제라고 믿는 사람은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며 항변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봄날은 간다〉(2001, 허진호)에서 이영애와 유지태가 대립한 이유요 양상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기는 곤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감정과 의지가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의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렴, 사랑은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의지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을 단 한 마디로 정의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요.


믿음의 문제

사도 바울이 사랑을 설명하는 데 동원한 수사는 무려 열다섯 가지에 이릅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란 감정만의 문제도, 의지만의 문제도 아닌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렇듯 사랑도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이지요.

곧, 믿는 사람에게는 유의미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조차도 감정의 차원과 의지의 차원을 동시에 지닌다고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믿음, 감정, 의지, 이 셋은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인지도 모릅니다. 공존 또는 공생―.

심지어 스스로 어느 한쪽에 굳건히 서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의 경우라 할지라도 때로는 감정이, 때로는 의지가, 때로는 믿음이 승(勝)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 아닐까요.

서로 다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라는 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은 모름지기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태가 드라마입니다. 다만 이 드라마를 출발시키는 것이 감정일 뿐이지요. 대개는 그렇지 않을까요.


의지와 믿음, 그리고 감정

〈너는 내 운명〉도 그렇게 벌어진 사랑이라는 사태의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태의 한 축인 황정민이 감정과 의지와 믿음으로 똘똘 뭉친 사내라는 점입니다. 아니, 의지와 믿음이 감정의 변화를 도무지 허용할 줄을 모른다고 해야 할까요.

오히려 의지와 믿음의 도움을 받아 감정은 점점 더 외곬으로 되어갑니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 허구적인 인물이 줄기차게 시연해 보이는 일방적인 좌충우돌의 사랑 행각이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렇게 뒤흔들릴 만한 무엇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 무엇이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자, 사랑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이며, 나아가 사랑이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의 존재를 섬뜩하게 실증해 보여준 영화가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데칼로그)〉(1989) 연작 가운데 제6편인 〈간음하지 말지니라 -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 이제는 ‘사랑이란 변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성숙한’ 여인이 바야흐로 겨우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한 ‘미숙한’ 소년의 딱하리만큼 유치하고 집요한 사랑 앞에서 마침내 변화되는 이야기―.

〈너는 내 운명〉은 정확히 이 지점까지 나아갑니다.

시골 총각 황정민의 사랑 공세로, 도시에서 흘러든 다방 레지 전도연이 마침내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는 자기 생각을 접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봄날은 간다〉는 이보다 딱 한 걸음만큼 뒤에서 멈춘 영화였습니다. 거기에서 이영애와 유지태의 사랑은 더는 아무런 변화 없이 끝납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 –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정작 여인을 돌이켜 세운 소년이 사랑은 없다는,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는 여인의 생각을 제 것으로 받아 지니게 되는 길목까지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이보다 더는 물론이고, 여기까지 나아간 사례도 저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


다시 믿음의 문제

이 대목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 –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봄날은 간다〉를 두 걸음, 〈너는 내 운명〉을 한 걸음 앞섭니다.

물론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가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순위는 바뀔 것입니다.

요컨대 순위 매기기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으냐가 기준이라면,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얼마든지 해볼 만한 작업일 것입니다. 바로 소망이라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사랑이 변하지 않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사랑이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원초적인 소망―.

여기서부터 사랑은 여지없이 ‘믿음’의 문제가 됩니다.


두 개의 반전

〈너는 내 운명〉은 두 개의 반전을 거느린 영화입니다. 이 두 개의 반전은 전도연이 황정민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둘의 결혼이 성사된 뒤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스스로를 전도연의 전남편으로 주장하는 알코올 의존증인 사내가 출현하는 대목이고, 또 하나는 전도연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대목입니다.

처음에는 그 사내의 출현이 더 심각한 문제인 듯 보이지만, 곧 극의 중심은 에이즈 쪽으로 현저하게 기웁니다. 곧,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도연에 대한 황정민의 사랑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된다는 것이 드라마의 핵심입니다. 아니, 황정민의 사랑은 오히려 전도연이 에이즈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야 그 진면목을 눈부시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비로소 이 영화는, 아니 황정민은 사랑이 무엇보다도 믿음의 문제임을 온 몸과 맘으로 도저하게 선언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거짓말 같으면서도 아름다운

영화의 맨 마지막, 에이즈와는 무관한 죄목으로 두 해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전도연의 모습이, 또 그 전도연과 황정민의 재회가 어딘지 거짓말 같으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그 덕입니다.

이에 견주면, 같은 한겨울이 배경이면서도 영화의 맨 앞에 놓인 〈오아시스〉(2002, 이창동)에서 설경구가 출소한 날의 장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황량했고, 〈친절한 금자씨〉(2005, 박찬욱)에서 이영애가 출소한 날의 장면은 냉소적이면서도 비장했습니다.

이것이 〈너는 내 운명〉의 마지막 특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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