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창호,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임권택, 〈길소뜸〉
C55.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기의 어려움 – 배창호,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 임권택, 〈길소뜸〉(1986)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이 드러낸 것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길소뜸〉을 서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두 영화가 모두 이산가족 문제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냉정한 견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1983년에 있었던 저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을 통하여 가족의 신화, 적어도 대한민국 가족의 신화는 그 허상으로서의 본질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생사의 여부조차 모르는 채 오랜 세월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가족, 그 이산가족의 느닷없는 재회가 불러일으킨 일시적인 감격과 흥분의 감정을 가족이라는 불패 신화의 증거로 새기는 것은 이제는 시효가 다한 이데올로기임은 물론이고, 염치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또는 주장은 그 재회가 그 재회의 당사자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했는가, 나아가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가, 하는 질문과 관계가 있습니다.
실은 이 생각을 우리가 조금 더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말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은 행복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행의 멍에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행복은 가족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겉으로는 가족을 강조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가족을 거북스러워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족에 대한 감정은 이중적입니다. 호오(好惡)가 섞여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이 이중적이라는 사태 자체가 이미 가족이라는 테마가 지극히 문제적이라는 사실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피 혈(血)’자가 들어가 있는 ‘혈육(血肉)’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피로 이어져 있으니, 싫어도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입니다.
피에 대한 책임전가
다시 말하면, 그럼으로써 우리는 피(血)에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족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북스러워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피를 빙자하여 덜어내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양심의 가책은 실체가 없습니다. 가책은 죄의 결과일 텐데, 그 죄에 해당하는 그 무엇이 없는 것입니다. 일종의 원죄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직접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한 가책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주입된’ 가책이지요. 이 가책의 밑바탕에는 가족에 대한 그 어떠한 부정적인 생각도 불경이라는 이념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쩌면 종교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저는 이 가책이 허상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족을 싫어하거나 거북스러워하면 왜 안 되는가―.
또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기면 왜 안 되는가―.
이런 질문들도 마땅히 던져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들조차 견뎌내지 못한다면 가족 이데올로기는 정말로 폐기 처분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가족 이데올로기가 끝내 살아남으려면 이런 질문들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또는 적어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체질 강화, 또는 체질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소뜸〉의 테마
임권택 감독의 역작 〈길소뜸〉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끓고 있는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자, 그 질문이 들끓고 있는 우리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길소뜸〉은 바로 이 지금껏 은폐되어 왔던 질문들을, 그것도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이 진행되는 와중에, 또는 그 직후에, 정말 솔직하고 용기 있게 제기한 셈입니다.
제가 〈길소뜸〉의 테마를 이산가족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이는 제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테마를 이산가족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입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태동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배창호의 필모그래피에서는, 그 자신도 밝혔듯이, 연출작으로 스스로 택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입니다. 곧, 의뢰를 받아서, 정확히는 의뢰를 수락해서 만든 영화입니다.
이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흥행 감독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경우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이미 수락했다는 말에 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박완서 선생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의 무엇이 배창호의 마음을 움직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 영화 또한 ‘배창호스러운’ 무언가를 분명히 포함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길소뜸〉의 차이
이 두 영화의 테마를 모두 이산가족 문제라고 규정하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이산가족이 재회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되고, 〈길소뜸〉은 재회한 이후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이산가족이 서로를 애타게 찾던 끝에 마침내 재회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해피엔딩의 감동적인 영화가 되고, 〈길소뜸〉은 재회한 이산가족이 다시 분열하는, 또는 재회가 끝내 온전한 모양새로 마무리되지 않는 안타까운 비극이 됩니다.
단순하고도 명쾌한 구분이지요. 하지만 이 구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차가 있기는 해도 두 영화에서 이산가족은 모두 일찌감치 재회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본론이 이산가족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적어도 이 만남이라는 사건은 영화의 초반부에 벌어집니다.
한데, 이 만남이 빚어내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지요.
이 행복하지 않은 감정의 핵심적인 주체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는 유지인이고, 〈길소뜸〉에서는 김지미입니다.
유지인은 약간의 의심의 과정을 거쳐서 일찌감치 이미숙이 자기 친동생임을 알아차립니다. 김지미도 한지일이 자기 친아들임을 진작에 알아차리지요.
아마도 이 대목에서는 혈육이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혈육만이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어떤 감각으로―그런 것이 있다면―가족을 단박에 알아봅니다. 아니, 느낍니다.
몇 가지 구체적인 근거자료는 그 느낌을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들은 그렇게 느끼려고 미리부터 잔뜩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지 않나 싶은 정도입니다.
유지인과 김지미의 차이
여기서 유지인과 김지미의 태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대놓고 다르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유지인은 이미숙이 자기 친동생임을 알아차린 뒤 그걸 부정하며, 김지미는 한지일이 자기 친아들임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걸 부정한다는 점에서 거의 똑같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기 가족을 부정하는 태도의 편차입니다.
유지인은 이미숙이 자기 친동생임을 알아차리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표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숨기는 것이지요. 이것이 전부입니다.
반면, 김지미도 한지일이 자기 친아들임을 알아차리지만, 그 알아차린 사실을 표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그가 자기 친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고 애쓰기까지 합니다. 그저 숨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지요.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그 부정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 유지인은 숨기는 것이고, 김지미는 부정하는 것이지요.
숨기는 것은 유보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고, 부정하는 것은 결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지인은 인정은 하면서도 밝히지를 않는 것이고, 김지미는 인정조차 않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길소뜸〉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일 것입니다. 바로 이 태도의 다름이 두 영화의 결말이 지닌 다름을 빚어낸 원인입니다.
무엇이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게 만드는가?
저는 이 두 개의 부정을 구체적으로 ‘가족이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문제’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문제는 이산가족이 아닌 가족에게서도 끊임없이 벌어지는 문제라는 것이 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가족에게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도록 만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유지인과 김지미의 태도입니다. 유지인과 김지미는 무엇 때문에 동생을,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걸까요.
그들은 동생을 동생으로, 아들을 아들로 인정하는 데 뭔가를 꺼립니다. 그 인정을 방해하는 어떤 꺼림칙한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꺼려지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두 영화는 바로 이 꺼려지는 것을 드러내 문제 삼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저 이산가족이라고만 하면 막무가내로 흐르는 눈물바다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마련인 우리에게 이 두 영화는 그래서 매우 유의미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점에서 두 영화는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엄밀하게 말해서 이 꺼려지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끝까지 밀어붙여 어설픈 해피엔딩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길소뜸〉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보다 한 걸음쯤 더 나아간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바로 이 점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길소뜸〉과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문제에서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길소뜸〉을 앞섰다고 저는 조심스럽게 평가합니다.
결과적으로 김지미는 가족을 끝내 부정하지만, 유지인은 가족을 끝내 인정하고야 맙니다.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건대, 어쩌면 바로 이 결말 때문에 배창호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영화로 만드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 결말 덕분에 마침내 이 영화는 ‘배창호스러운’ 영화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인정과 부정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유지인이 이미숙을 자기 친동생으로 끝내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요. 유지인은 숫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표명합니다. 그럼으로써 두 자매의 감동적인 재회가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 이 영화의 결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길소뜸〉은 김지미가 한지일을 자기 친아들로 끝내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던 김지미가 급정거를 한 번 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가던 방향 그대로 다시 차를 운전해 멀어져 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지요. 그러니까 〈길소뜸〉이 앞서 언급한 그 어떤 ‘꺼려지는 것’을 끝까지 추적하여 과감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영화라는 규정은 옳습니다.
반면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유지인은 마침내 이미숙이 자기 친동생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어 둘 사이의 감동적인 재회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 눈물범벅이 된 두 자매의 모습에서 〈길소뜸〉에서와는 또 다른 의미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꺼려지는 것, 수난의 의미
이쯤에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길소뜸〉과 같이 그 어떤 ‘꺼려지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영화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딘가 아귀가 딱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꺼려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꺼려짐’을 견뎌내고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꺼려짐을 극복해야만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어려움을 보여주는 영화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입니다.
그러니 두 영화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글쎄요.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적어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마지막이 섣부른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만은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길소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과 결국은 다른 셈입니다.
저는 이 다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분명히 ‘꺼려지는 것’을 극복하고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표현하면 ‘수난’이 되겠지요.
〈길소뜸〉은 단지 그 ‘꺼려지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드러내 보여주는 데만 주력합니다.
가족, 그 끔찍한 관계
다소 말장난 같지만, 그러니까 이 ‘꺼려지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태도의 냉엄함에서는 〈길소뜸〉이 앞서지만, 이 ‘꺼려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까지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앞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보여주는 것은 극복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해야 더 어울리는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이토록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거겠지요.
〈길소뜸〉은 그 어려움 자체를 보여주었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험난한 과정을 겪음으로써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그렇게나 어려운 수난의 과정을 겪어야만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가족임을 보여준 셈입니다.
그러니, 가족이란 얼마나 ‘끔찍한’ 관계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