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트 리브스, 〈클로버필드〉
C53. 다섯 가지 의문, 또는 질문 – 매트 리브스, 〈클로버필드〉(2008)
Q1. 〈클로버필드〉는 다큐멘터리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CG로 만든 근사한(!) 거대 괴물이 등장하여 용가리나 고질라보다 더 우악스럽게 인류가 이루어놓은 첨단 문명을 그야말로 초토화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세상에 그 누가 이 영화를 가리켜 다큐멘터리라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영화와 담을 쌓고 살지언정, 스크린 위에서 좌충우돌, 그 현대문명의 상징인 거대한 마천루들을 가차 없이 무참하게 짓부수고, 무차별로 인명을 살상하는 이 무지막지한 괴물을 진짜라고 믿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설마 그럴 리가요.
Q2. 〈클로버필드〉는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찍은 영화인가?
여기에는 선뜻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도 아마 있지 않을까요. 저도 “예스냐, 노냐?”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예스!”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설사 그렇게 답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내 ‘정말 그런가?’ 하고 한 번쯤은 속으로 자기 생각의 확고함이 어느 정도인지 의심해보지 않을까요?
이 영화가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캠코더를 들고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본능적으로 무작정 찍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실은 카메라를 그저 끄지 않았거나, 끄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해도 될 듯하지만요―촬영하여 만들었다는 것은, 〈블레어 위치〉(1999, 다니엘 미릭 & 에두아르도 산체스)라는 ‘선례’, 또는 〈곤지암〉(2018, 정범식)이라는 ‘후례’를 감안하더라도, 그리 틀린 명제는 아닐 것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일반시민이 캠코더를, 지금이라면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가 우연히 교통사고 현장을 찍어 텔레비전 뉴스에 제보하는 화면과 하등 다를 게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클로버필드〉를 두고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찍은 영화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어도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찍어서 만든 영화’라는 명제가 〈클로버필드〉에 관한 모든 석연치 않은 의문들을 일시에 다 해소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Q3. 〈클로버필드〉는 몇 개의 테이프를 사용해서 찍었는가?
요즘 같으면 당연히 스마트폰이겠지만, 〈클로버필드〉는 무슨 흉내를 내듯, 방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휴대용 캠코더를 사용하여 촬영하였습니다.
이게 조금 이상합니다.
촬영자가 캠코더를 들고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기록하는 것은 어른의 손아귀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캠코더를 들고 무엇인가를 촬영할 때 누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방식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60분짜리 miniDV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데, 영화의 러닝 타임은 60분이 훨씬 넘습니다. 또 영화 속 시간은 전날 저녁에서 이튿날 아침까지입니다. 중간에 테이프를 갈아 끼웠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번에는 배터리의 사용 시간이 문제가 됩니다. 또, 정황상 테이프나 배터리를 교체할 여유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디테일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챙기지 않은 것을 연출상의 허술함이라고 해도 될까요? 이런 점들까지 알뜰히 챙겼다면 훨씬 더 실감이 났을 것 같기는 합니다.
Q4. 중간중간 끼어드는 난데없는 화면은 무엇인가?
〈클로버필드〉에는 바야흐로 현재 한창 진행 중인 사건이 아닌, 이미 지나간 날짜의 장면, 마치 〈돌이킬 수 없는〉(2002, 가스파 노에)의 마지막 대목 같은 행복한 장면이 잊어버릴 만하면 문득문득 끼어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촬영해 놓은 테이프에 덮어씌우듯 촬영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매끈하게 연속촬영이 되지 않고 테이프가 헛돌아간 부분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과거 장면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게 또 이상합니다.
일반적으로 덮어씌우듯 촬영해도―일종의 테이프 재활용일 텐데―일부러 테이프를 플레이시켜 기왕에 촬영해 놓은 장면을 다시 확인한 다음 그것을 지우지 않고, 또는 되돌려놓지 않고, 거기서부터 다시 촬영하지 않는 한 그런 식으로 이전 촬영분이 남아 있을 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득 끼어드는 장면의 정서적 효과는 대단합니다. 지금의 끔찍한 상황하고의 대비가 자아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가슴 저림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Q5. 〈클로버필드〉의 등장인물들은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
우디 앨런 영화도 아닌데, 또 우디 앨런 영화처럼 일상적인 상황도 아닌데,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무지하게 말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지껄입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면 속에 들어오는 인물들은 마치 그 순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쏟아놓습니다. 심지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인물도 쉴 새 없이 떠들어댑니다. 듣고 있으면 귀가 따가울 지경입니다. 물론 무지막지한 공포를 견뎌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직접 캠코더를 들고 작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연속촬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이것은 이 영화가 철저한 계산에 입각하여 편집되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연속으로 촬영한 것을 편집 없이 그대로 상영했을 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방식입니다.
만일 연속촬영이라면 사전에 철저한 계획을 세워두고, 그에 입각하여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장면만 집요하게 선택적으로 촬영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그런 선택적인 촬영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연출과 사실, 거짓과 진실
우리는 흔히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사실을 찍은 것이라고 믿기 쉽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또 다큐멘터리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일단 믿고 들어가는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곧, 찍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람(관객)을 속일 수 있는 것이 다큐멘터리라는 뜻이지요.
다큐멘터리 비슷하지만, 온전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것들을 이른바 ‘모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구분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택시블루스〉(2007, 최하동하)라는 작품이 논쟁적이었던 것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었지요. 사실 속에 사실이 아닌 것을 슬쩍 끼워 넣으면 사람들은 사실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사실보다는 진실이 더 중요하다는 이 상투적인 명제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 가짜에 기만당하지 않고 연출과 사실, 거짓과 진실을 또렷하게 구분하고 가려내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다큐멘터리와 〈클로버필드〉 사이에서 문득 해보는 고민입니다. *